[농민신문 내 마음의 시] 정일근 교수
[농민신문 내 마음의 시] 정일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6.07.13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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⑶백석의 ‘靑枾’

 

 

 

  ‘풋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별 많은 밤

  하누바람이 불어서

  푸른 감이 떨어진다 개가 즞는다

  ‘청시’ 전문, <백석시 전집. 이동순 편. 1987>

 

 

 

 

 어린 시절, 감꽃이 피던 고향의 풍경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에게는 감나무와 함께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의 시놉시스일 것입니다. 그 장면에서 우리는 마당 가득 떨어져 있던 감꽃을 주워서 목걸이를 만들던 주인공이 됩니다.

 어린 저는 감나무가 야속하게 떨궈버리는 감꽃들이 안타까웠습니다. 감꽃 하나에 감이 한알 열린다는, 농부였던 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부터였습니다. 이렇게 감꽃이 지다가는 할아버지네 감나무에 감이 한알도 달리지 않을지 모른다는 걱정에 작은 발을 동동거리며 감꽃을 주웠습니다. 하지만 제 걱정과 달리 감나무는 감꽃을 수북이 떠나보냈지만 가을이면 주렁주렁 붉은 감을 달고 찾아왔습니다.

 철이 든 뒤에 일찍 지는 감꽃은 안타까움이 아니라, 남아 있는 감꽃에게 실한 감을 달아달라는 배려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꽃이 꽃에게 베푸는 희생이며 양보였습니다. 그런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감나무에는 작고 푸른 감들이 다닥다닥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앙증맞은 그런 어린 감을 풋감이라 불렀습니다. ‘풋’이란 접두사에서 여름의 내음이 물씬 몰려왔습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백석 시인(1912~1996)은 풋감이 달리던 고향 밤의 풍경을 ‘청시(靑枾)’라는 단 세줄의 시로 표현했습니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이 짧은 시 한편에서 감꽃이 피었다 지고, 풋감이 달리고, 감이 붉게 익어가는 시간들이 순식간에 흘러갑니다.

 감나무에 풋감이 달리던 밤하늘에는 별 또한 무수히 찾아왔는가 봅니다. 그때 서풍인 ‘하누바람(하늬바람)’이 불고 익지 못한 풋감들이 툭, 투툭 소리를 내며 떨어집니다. 감 떨어지는 소리에 놀란 개가 깨어 짖었나 봅니다. 눈을 감고 백석의 시를 읊조리면 풋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지금은 우리가 잊어버린 소리여서 더욱 사무칩니다.

 저는 아직 중국 랴오닝성 톄링시에 머물고 있습니다. 여기는 새벽 4시가 되기 전에 날이 밝아옵니다. 땅을 닮은 부지런한 농부들이 자신의 여름농사를 들고 나와 긴 줄을 이루며 새벽시장이 섭니다. 푸르고 싱싱한 남새들이 이곳의 칠월이 얼마나 건강한지를 펼쳐 보입니다. 어제는 새벽시장을 기웃거리다가 보았습니다. 한 아낙이 오이를 크기대로 단정하게 진열하고, 그 사이사이 노란 오이꽃을 떨구어놓은 것을. 저에게 그 풍경은 그대로 한편의 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그리 멀지 않은 백석 시인의 고향 정주, 그곳에 풋감이 건강하게 여름을 견디는 모습이 언뜻 스쳐 지나갔습니다.

<위 글은 농민신문 2016년 7월 13일(수)자 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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