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신문 칼럼] 변종현 교수
[경남신문 칼럼] 변종현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7.05.24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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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독서당에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은 신라 문성왕 시절 경주에서 육두품(六頭品)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머리가 뛰어나 12살 때 당나라에 건너가서 18세에 빈공과 (賓貢科)에 급제했다.

  23세 때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高騈)의 종사관이 돼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지어 문명을 떨치게 됐다. 당나라에 있는 동안 고운(顧雲), 나은(羅隱) 등 당나라 여러 문인들과 교유했으며 29세 때 신라로 돌아와 관직에 등용됐는데, 신라 말기의 어려운 정치 현안을 타개하기 위한 계책을 왕에게 여러 번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34세부터 지방관으로 나가 태수를 지냈다. 38세에는 육두품으로는 최고 관직인 아찬(阿飡)에 올랐고, 당시의 정세에 시급히 힘써야 할 시무책(時務策)을 올렸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마흔이 넘자 세상에 대한 뜻을 버리고 경주 남산, 합천 해인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의 월영대 등을 노닐다가 가야산에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쓴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가야산 독서당을 두고 지음)’도 이러한 그의 정신세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겹 바위 틈 마구 달려 겹겹 산봉 울려대니,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사람 소리 지척에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옳다 그르다 하는 말 들릴까 봐, 故敎流水盡籠山(고교유수진농산) 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감쌌노라.’

  이 시는 가야산 해인사 입구에 왼쪽 계곡의 농산정(籠山亭), 오른쪽 언덕 위의 독서당(讀書堂)과 함께 길 옆 오른쪽 암벽에 초서로 음각(陰刻)되어 전하고 있다.

 


  세차게 흐르는 물이 겹겹이 쌓인 바위 틈을 마구 달려 겹겹 산봉우리에 울려대니, 사람들 말소리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도 분간하기 어렵다. 옳다 그르다 하는 시비(是非) 소리가 귀에 들려 올까 봐, 일부러 흐르는 물로 하여금 온 산을 감싸 흐르게 했다는 것이다. 결구의 ‘교(敎)’는 사역동사(~ 하여금)로 쓰였다. 이 시는 세상의 시비로부터 벗어나 자연 속에서 안주하려는 고운의 내면의식이 잘 드러나 있으며, 후대 선비들의 처세에 한 모형을 제시하기도 했다. 고운의 삶을 돌아보면 한 인간이 살면서 겪어야 할 고뇌를 누구보다 많이 겪었으리라 짐작된다.

  어려서는 신라를 떠나 당나라에서 이방인으로서 외로움을 겪었을 것이고, 돌아와서는 골품제(骨品制)라는 신분적 한계 상황으로 인해 정치적 소신을 제대로 펼치지 못해 울분이 쌓여 갔을 것이다.

  그래서 지방 군수로 여기저기 떠돌다가 마흔이 넘자 벼슬을 그만두고 산천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 다니면서 마음을 추스르며 지냈던 것 같다. 위 시에서도 세상의 시시비비로부터 벗어나 자연 속에서 지내려던 고운의 은거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위 글은 경남신문 2017년 5월 24일(수)자 23면에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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