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시론] 송민순 석좌교수
[중앙일보 시론] 송민순 석좌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7.01.17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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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와 역사의 운율

  미·소 간 ‘제로 옵션’ 협상 과정에서

  외교력 보인 독일 해법 주목할 때

  편 가르기보다 내부 통합 토대 위에

  모든 협상카드로 유연성 발휘해야

 


  “역사 그 자체가 반복되지는 않는다. 다만 운율을 갖고 있다.” 마크 트웨인이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와 동북아의 먼 미래까지 영향을 미칠 사드 배치, 즉 미사일방어망 구축 논란이 30여 년 전 유럽의 중거리 핵미사일 철수 협상과 운율을 맞출 수 있을까.

  냉전이 한창이던 1977년 소련은 서유럽을 겨냥한 SS-20 등 중거리 핵미사일을 서부 지역에 배치했다. 이에 대응해 북대서양 조약기구(나토)는 미국의 퍼싱2 등 미사일을 대응 배치키로 했다. 군비경쟁이 악화일로로 치닫던 중 레이건 대통령은 81년 소련의 미사일 철거와 미국의 미사일 불배치를 연결시킨 소위 ‘제로 옵션’ 협상을 제안했다.

  협상은 중단과 재개의 우여곡절 끝에 87년 6년 만에 타결됐다. 전 세계에 배치된 미·소 양측의 사거리 5500㎞ 사이의 모든 미사일이 91년 철거 완료됐다. 이 사건은 냉전 종식과 독일 통일로 가는 길목의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

  당시 서독의 기민-자민 연정 파트너를 이룬 콜 총리와 겐셔 외교장관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국내의 찬반 여론을 조정하면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타협을 유도하지 않았다면 이 역사적 합의는 탄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던 것으로 평가됐다.

  서독은 동·서 데탕트를 추진해야 독일의 미래가 있다는 판단하에 이미 독일에 배치된 퍼싱 미사일의 일부를 먼저 철수시켜 타협의 마중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어느 쪽도 결정적으로 실망시키지 않는 외교력을 발휘했다. 당시 이미 5년간의 내무장관과 13년간의 외교장관을 맡아오던 겐셔의 외교 수완을 두고 ‘겐셔리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지금의 사드 논쟁은 당시 상황과는 차이가 있으나 전체 구도는 유사하다. 한국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같다. 한반도에서 핵무기와 운반수단을 제거해야 하고 남과 북, 그리고 미·중 사이의 데탕트를 추구해야 한다. 지금 동북아에서는 미·일·한과 중·러·북을 축으로 한 군비경쟁 조짐이 있다. 북한이 중국의 그늘을 들락날락하며 핵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는 것은 표면에 도드라진 현상의 하나다. 기본적으로는 미·중이 타협해야 해결의 문이 열릴 수 있다. 그 촉매 역할은 당시 서독처럼 한국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미 배치키로 결정된 사드를 중국이 반대한다고 해서 철회하거나 지연시킬 수 없다는 주장과 남북관계나 국가 안보의 실익도 없이 한·중 관계만 악화시킨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친미냐 친중이냐, 사대냐 자주냐 하는 논쟁은 가히 지적 함몰 수준에 이르고 있다. 30년 전 서독에서는 69년부터 사민-자민 연립이 추진해 오던 동방 정책을 82년 기민-자민 연립이 이어받았다. 연립 정부의 한 효과이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드 배치 결정 이전에 북한 핵문제 해결의 진전을 위해 좀 더 효과적인 외교를 전개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태라고 해서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진지한 북핵 협상이 개시되면 사드 배치의 명분은 줄어들 수 있다. 중국이 북한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고 필요하면 강압적 수단도 강구해야 한다. 한국과 미국도 자신감을 갖고 중국이 그런 역할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시간과 공간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 당장 사드로 방어코자 하는 북한의 핵미사일이 배치된 것도 아니다. 미국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실험 중단, 한·미의 군사 훈련 조정, 대북제재 완화, 남북과 미·북 대화를 포함해 협상을 진전시킬 수 있는 모든 카드를 테이블 위에 올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한·미는 30년 전 유럽과 같은 ‘제로 옵션’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인 협상 조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설사 최종적으로 사드를 배치해야 하는 경우에도 적합한 명분이 축적된다.

  중국도 안보와 경제를 연결시켜 한국을 압박하는 거친 수단을 중단해야 한다. 한국의 국내 정세 추이를 이용해 한·미 동맹을 이완시키려는 전술로는 결코 아시아의 주변국들로부터 존중받지 못할 것이다.

 


  그 무엇보다 우리 정치권이 국내에서는 타협을 보지 못하면서 미국과 중국으로 편을 나누어 매달리는 모습은 우리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든다. 내부 통합이 우선이다. 우리는 정권 생존을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북한, 북한의 붕괴를 북한 핵보다 더 큰 위협으로 간주하는 중국,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중국 견제망 구축을 우선시하는 미국을 상대해야 한다. 분열된 국론으로 국가 이익을 보호하겠다는 생각은 허상에 가깝다.
 
  세계는 지금 트럼프·시진핑·푸틴처럼 근육질의 정책을 추구하는 소위 ‘스트롱맨’의 시대다. 유럽에서 ‘제로 옵션’ 협상이 개시되던 81년에도 레이건·브레즈네프·대처 같은 스트롱맨들이 할거했다. 그러나 그들을 엮어 모은 것은 독일의 유연한 정책이었다. 한국이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대내 통합성과 대외 유연성이다.
 

<위 글은 중앙일보 2017년 1월 17일 (화)자 29면에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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