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신문 칼럼] 변종현 교수
[경남신문 칼럼] 변종현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6.12.0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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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려의 신하 노릇과 처세

  고려 후기 이제현(李齊賢)은 열다섯에 과거에 합격해 6대 왕을 섬기면서 네 번이나 재상(宰相)에 올랐으며 원(元)나라에서 충선왕을 모시면서 조맹부(趙孟?) 등과 사귀었고 고려말에 외교적으로 많은 일을 수행했다.

  이제현은 고문(古文)을 확립하는데 공을 세웠고,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고려에 도입해 유행시켰고, 중국의 역사적 인물들을 시적 제재로 해 쓴 영사시(詠史詩)를 잘 썼다.

  자신은 원나라 지배 시에 여섯 왕을 잘 보필했고 문인으로서도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다음 ‘범려(范?)’라는 시에서도 신하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論功豈?破强吳(논공기시파강오)

  공 논하면 어찌 강한 오나라 깬 것뿐이랴

  最在扁舟泛五湖(최재편주범오호)

  가장 큰 공 거룻배를 오호에 띄운 거지

  不解載將西子去(불해재장서자거)

  서시를 태우고서 떠날 줄을 몰랐던들

  越宮還有一姑蘇(월궁환유일고소)

  월궁에도 다시 하나 고소대가 섰을 테니

 

  범려는 춘추(春秋)시대 월(越)나라 공신으로 월왕 구천(勾踐)을 도와서 오(吳)나라 부차(夫差)를 쳤으나 뒤에 벼슬을 내어 놓고 은거했다.

  높은 명예와 지위는 오래 누릴수록 위험하다고 여겨서 성명도 치이자피(?夷子皮)로 바꾸고, 재산을 많이 모은 다음 그 재산을 모두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줬다.

  다시 도(陶) 땅으로 가서 스스로 도주공(陶朱公)이라 부르고 부자가 되어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일반적으로 범려의 가장 큰 공은 월왕을 잘 보필해 오나라를 깨뜨린 데 있다고 논의하는데, 이 시에서는 거룻배를 오호에 띄워 서시를 데리고 떠나간 데에 있다고 했다. 범려는 미인계(美人計)를 써서 서시(西施)를 오왕에게 바쳐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서시는 오나라를 망하게 한 뒤에 다시 범려에게 돌아가 함께 오호로 떠나갔다는 것이다. 결구에 나오는 고소대(姑蘇臺)는 오왕이 서시를 위해 지은 대(臺)로 높이가 300장이나 됐다고 한다.

  이 시에서 이제현은 범려가 서시를 데리고 떠나지 않았더라면 월왕도 오왕처럼 서시에게 빠져서 나라가 망하게 됐을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한 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게 하려면, 국가의 원수가 성군(聖君)의 자질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이제현과 범려와 같은 인물들이 잘 보필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글은 경남신문 2016년 12월 5일(월)자 23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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