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6.11.10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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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올라간 경남·부산 문학인

  이념·가족 등 이유로 월북 문학인 된 이들

  더 잊히기 전 연구해 통일시대 물꼬 맞아야


  전집 내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시와 줄글, 평론에다 고전 번역까지 걸쳐 있으니 갈무리만 하더라도 예사 일이 아니다. 월북 뒤 문필 활동이 넓고도 오래 이어졌던 까닭이다.

  다행히 그들 가운데 많은 것을 아내가 간수하고 있었다. 아내 류희정은 1990년대 초반부터 지난해까지 이어지고 있는, 큰 기획 '현대조선문학선집'을 거의 도맡고 있다. 60권을 넘게 낸 그들 자료를 챙기면서 남편 것에 각별히 눈길을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처남이 미국 국적으로 두어 차례 누부를 만나 그들을 챙겨 왔다 한다. 문헌 반출이 극히 어려운 북한 쪽 사정으로 볼 때 특별한 경우다.

  경남 거창 출신 시인 김상훈이 그다. 북한 체제에서 살아남은 몇 되지 않은 경남·부산 지역 문학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를 포함해 을유광복부터 경인전쟁기 사이에 적지 않은 역내 문학인이 휴전선을 넘고 피아 경계를 건넜다. 그들의 월북 시기는 크게 넷으로 나뉜다. 을유광복과 더불어 일찌감치 평양으로 올라간 경우다. 1946년 하반기부터 좌파 활동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휴전선을 넘은 경우가 다음이다. 세 번째가 1948년 남북한 단독 행정부 수립을 앞뒤로 월북을 택한 경우다. 전쟁기 남침한 인민군이 후퇴할 때 그들을 따른 경우가 네 번째다. 김상훈은 이에 든다.

  그런데 월북한 그들을 두고 통합적인 조사, 보고는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라 단위로 보더라도 1987년 그들을 상대로 부분 복권이 이루어진 뒤 유행처럼 관심이 쏟아지다 사그라진 지 오래다. 지역 단위로, 그것도 알려져 있지 않은 문학인 경우에는 이름조차 묻힌 상태다. 그들은 어떤 연고로 삶의 경계를 바꿀 수밖에 없었던가. 북한에서 어떻게 살다 이승을 떴던 것일까. 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드물지 않게 '로동신문'에 월북민, 곧 북한식 표현으로 '의거자' 환영 행사 기사와 회견담이 실리곤 했다. 명망가 경우는 자주 신문에 이름을 올려 후대를 받았다.

  경남·부산 지역 문학인에는 어떤 이가 그에 드는 것일까. 연극 영화인으로는 밀양 박석정, 마산 강호, 언양 신고송이 금방 떠오른다. 일찌감치 북한으로 올라가 1960년대까지 북한 초기 연극 영화의 틀을 잡은 세 사람이다. 시인으로는 거창 김상훈, 합천 박산운·임호권·이성홍, 통영 장춘식·유치상을 들 수 있다. 이성홍은 이주홍 동생이다. 박산운은 북한 대표 격 시인으로 자랐다. 소설가로는 엄흥섭·이갑기가 있다. 엄흥섭은 충청도 태생이나 진주에서 문학인으로 컸다. 이갑기는 대구 출신이다. 광복 뒤 부산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옮겨 갔다.


  이들의 월북 동기는 다 다르다. 한결같은 계급주의자로서 북한을 선택한 이도 있다. 나라잃은 시대 자신의 죄과를 숨기기 위해 광복 뒤 좌파 조직으로 피신했다 다시 북으로 올라간 이도 있다. 되돌아 왔지만 이원수가 그런 경우다. 어떤 이는 한 하늘을 지기 싫은 가족을 피해 넘어갔다. 유치환의 동생 유치상과 누이 유치표다. 달아나거나 쫓겨가거나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학교와 같은 곳에서 재교육을 받고 필요 부서에 배치되었던 그들이다. 전쟁을 거치며 희생 당했다. 그나마 남은 이는 박헌영 파당에 카프계 구지식인이라며, 김일성주의 체재 구축 과정에서 차례차례 제거되거나 사라졌다. 살아남은 이는 김성훈·박산운·임호권 정도다.

  이들 가운데는 항왜 투쟁으로 나라잃은시대 몇 해씩 갖은 옥고를 치른 이도 있다. 박석정·강호·신고송이다. 왜로에 의한 이른바 징병을 벗어나기 위해 유격대로 몸을 던진 이도 있다. 유학생 몸으로 동경에서 왜경에 끌려 온 이도 있다. 돌아온 내 나라에서 그들은 머물지 못하고 다시 북으로 떠난 것이다. 그들이 겪었을 비통과 암울, 보람과 좌절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고스란히 우리 것이다. 월남 문학인 못지않게 분단 시대의 질곡을 겪었던 그들이다.

  그들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지역에 남겨진 필수 과업 가운데 하나다. 더 잊히고 묻히기 앞서 서둘러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지금껏 우리가 지역 명망가로 입에 올리고 있는 문학인들의 실체와 위상에 대한 성찰이 아울러 이루어질 것이다. 통일 시대를 여는 첫 마당이 문학일 수 있으며, 그 첫 디딤돌이 지역 월북 문학인에 대한 이해라 한다면 지나친 말인가.

  그나저나 김상훈 전집이 쉬 나올 수 있으려나. 2002년 거창 가조 온천 지구에 그의 시비가 설 때 한 차례 시 전집을 냈던 나다. 그런 연고로 시인의 처남과 닿는 서울 한 연구자가 새 전집 출간을 맡을 수 있을지 뜻을 물어 온 적이 있었다. 완곡히 물렸지만 인연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를 일이다. 그런데 전집이라면 어찌 김상훈에게만 걸릴 일이랴. 장춘식·이성홍·유치상을 제쳐 둔 나머지 경남·부산 월북 문학인은 모두 묵직한 몇 권의 전집을 감당할 인물이다. 광복기까지 작품을 모은 신고송 전집만 2008년에 두 권으로 나온 바 있다. 아직 묶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재북 시기 작품은 그보다 더 많다.

<위 글은 국제신문 2016년 11월 10일(목)자 31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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