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6.09.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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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 극작가 박재성과 일본인 아내 방자

  예술가·후원자로 만나 식민지 시대 사랑 나눠

  증오 넘친 한일관계 속 두 사람 믿음·가치 빛나


  지역을 단위로 삼은 문학 연구를 조직적으로 시작한 처음은 부산경남지역문학회다. 학회지 '지역문학연구' 창간호를 낸 때가 1997년 8월이었다. 이듬해 대구에서도 대구경북향토문학회가 이뤄져 '향토문학연구'를 내기 시작했다. '지역문학연구'는 2006년까지 14집까지 낸 뒤 멈추고 지역문학총서라는 낱책 간행으로 길을 바꾸었다. 2012년부터는 전주를 텃밭으로 삼은 한국지역문학회가 만들어졌다. '한국지역문학연구'를 해마다 두 차례 내고 있다. 지난 2월에 나온 7집에는 부산경남지역문학과 관련한 흥미로운 글이 실렸다. 경남대 김봉희 교수가 쓴 '극작가 박재성의 아내 요시코(芳子)의 편지글에 대한 소고'가 그것이다.

  박재성은 1915년 통영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3남 2녀 가운데 차남이었다. 부산 동래고보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졸업생 명부에서는 이름을 볼 수 없다. 1930년대 중반 일본 도쿄로 건너가 법정대학 불문과에 입학했다. 문학에 포부를 두었던 그는 1942년과 1943년, 해를 이어 동경제국대학교 문예지 '적문문학(赤門文學)'에 희곡 '만추'와 '왕관'을 발표했다. 뛰어난 재능을 한껏 떨친 셈이다. 1945년에는 서울 극단 현대에서 자신의 창작극 '산비둘기'를 공연했다. 그 일로 왜경의 소환을 받자 강원도로 몸을 피했다. 을유광복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뒤 통영문화협회 결성에 앞장섰고, 통영여자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일하면서 지역 연극 활동에 열중했다.


  박재성의 아내는 일본인. 이름이 사미방자(寺尾芳子)였다. 1936년 도쿄 길상사의 공원에서 만나 첫눈에 끌린 두 사람이다. 1947년 여름 방학을 틈타 박재성은 아내를 통영으로 데려오기 위해 밀항선을 타고 도쿄로 건너갔다. 그녀와 함께 돌아오는 도중 대마도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다. 배가 침몰하는 불운으로 둘은 함께 이승을 등졌다. 박재성의 나이 서른세 살 때였다. 천재로까지 불렸던 그와 아내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이번 김 교수의 글은 그녀가 통영 남편에게 하루바삐 자신을 데리러 와 달라는 투정 아닌 투정과 박재성을 향한 사랑을 가득 담은 편지글을 소개한 것이다. 1946년 10월 1일에서 1947년 8월 25일까지 쓴 127편이 그것이다. 글 끝에다 김 교수는 그녀의 편지 세 편을 옮겨서 공개했다.

  "내 재성, 설령 하루밖에 살 수 없다 해도 그 목숨을 걸고서라도 당신이 계신 겨울로 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조선에 가서 겪을 고난의 생활은 전 잘 모릅니다. 저는 일본인입니다. 당신이 힘든 생활을 할 때, 전 반 부르주아처럼 세상물정 모르고 편안히 자랐습니다. 일본이 조선에 저지른 사실을 이제야 확실히 알아버린 겁니다. 당신을 십 년하고도 하루나 괴롭혔다는 것도 저를 약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 진정을 알아 줄 때까지 독설에도 구타에도 견뎌낼 것입니다." "위대한 작가 재성의 아내로서 지녀야할 자격이 고통이라면 극복할 것입니다." "예술을 향한 제 동경도 순수한 열정도 모두 당신 작품에 생명을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재성 저는 당신을 믿어요. 누가 뭐라 해도 전 견뎌낼 수 있어요." "우리들의 행복한 고통이 크면 클수록 위대한 사랑에 대한 보답이 있을 거라고 전 믿습니다." "재성 저를 믿고, 건강 생각하면서 공부하세요."

  1946년 12월 30일 자 편지 가운데 한 부분이다. 박재성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 그리고 헌신에 찬 그녀 마음이 잘 담겼다. 아름다운 사랑을 완성하고자 하는 뜻이 옹골차다. 그 일을 행복한 고통이라 했다. 위대한 작가의 아내로서 모자람 없이 고난을 헤쳐 나가겠다는 각오가 굳세다. 박재성을 만나 함께했던 "십 년째 내면의 투쟁으로" "입과 붓으로는 표현이 다 안 될 만큼 피투성이만 남아버린 자신"이라고 쓰기도 했던 그녀다. 피식민자 한국인의 여자로서, 가난한 작가의 아내로서 겪었을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하루바삐 한국으로 데려다 줄 날만 기다리며 그를 그리워했다. 박재성에게 그녀는 뮤즈와 같은 존재였고, 그녀 또한 그것을 자임했던 셈이다.

  오늘날도 신종 왜로(倭虜)는 이른바 '일한합방(日韓合邦)'을 했다 우리가 '독립(獨立)'해 나갔으니, 다시 '합방'하면 되리라는 어처구니없는 망상에 갇혀 산다. 식민지 수탈 마지막 시기인 1940년대에는 이른바 '황민화'라는 허울 아래 '내선혼인(內鮮婚姻)'을 떠벌리기도 했던 저들이다. 박재성과 방자 두 사람은 그런 책략이 더럽히지 않는 드높은 곳에서 청년 예술가와 후원자로 만나 사랑을 가꾸었다. 끊임없는 침략 야욕에 서로에 대한 증오, 멸시만이 노도처럼 넘실거리는 한일관계 속에서 두 사람의 사랑과 믿음은 소중한 가치로 빛난다. 하루바삐 그녀의 편지 127편 모두가 출판되기를 바란다. 둘의 사랑을 삼켜버린 대마도 앞바다의 비극은 한일관계를 고심하는 모든 이에게 한 본보기로 거듭 되새겨지리라.

 

<위 글은 국제신문 2016년 9월 1일(목)자 31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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