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6.06.30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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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명 일기시와 부산·경남 근대 증언

 

결기에 찬 시어로 1940~1970년대 증언

  우리 어버이 세대의 자랑스러운 자화상


  며칠 비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일터에서 돌아와 보니 탁자 위에 책이 한 권 놓였다. 두툼하다. '송강(訟岡) 김기명(金奇明) 문집'(전망, 2016). 낯선 분이다. 아마 아내가 아는 이로부터 받은 모양이다. 누군가의 회고기겠거니 예사롭게 생각하고 펼쳤다. 그런데 뜻밖에 시집이다. 시인의 약력이 있나 살폈다. 보이지 않는다. 단출하다. 앞머리에 몇 장, 본인과 가족사진이 올라 있을 따름이다. 그마저도 풀이를 붙이지 않았다. 군더더기는 죄 빼버린 셈이다. 저녁밥을 먹으며 나도 알음이 있는 이의 선친 문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송강 김기명(1916~1975). 세상에 이름을 뿌리고 간 이는 아니다. 삶의 곡절을 알기 힘들다. 흥미로운 점은 시 끝머리마다 쓴 날짜를 붙였다는 사실이다. 작품을 쓸 무렵 개인적, 사회적 맥락을 짐작하는 데 유효한 꼴이다. 곧 일기시다. 나날살이에서 겪은 바를 일기 쓰듯 쟁여 두는 방식이다. 그렇게 쓴 작품 가운데서 가려 뽑은 시 190편과 줄글 6편이 속살을 이루었다. 여읜 지 마흔 해가 흐른 뒤였다. 맏이 재범이 벽장 속에서 유고를 찾아낸 것이다. 새벽녘마다 글을 쓰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기억하는 아들이었다. 유고집을 낼 용기를 다잡았다.

  시집은 1940년대에서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작품을 다섯 묶음으로 나누어 실었다. 첫 작품은 1946년 일본 밀항에 실패하고 쓴 것이다. 마지막 작품이 "잎잎에 젖가슴에 가을이 오다"고 노래한 1973년 작 '포도나무'다. 이승을 뜨기 두 해 앞선 시다. 그러하니 시집에는 스물일곱 해 동안에 쓴 작품이 실린 셈이다.

  시인은 십 대 어린 나이에 '왜제(倭帝)'의 동경으로 건너갔다. 고학을 하면서 '뒷골목 우동 한 그릇 대가'에 땀을 쏟았다. 열세 해 뒤 을유광복을 맞아 귀국선을 탔다. 작품은 그 뒤부터 운명할 무렵까지, 30대에서 50대에 걸친 것들이다.

  이 시기 부산·경남 지역은 민족상잔을 온몸으로 겪었다. 임시 서울로서 나라를 지켰다. 부산과 경남으로 행정이 갈라지고, 울산에 공업지구가 들어섰다. 경제개발의 깃발 아래 압축적 근대의 숨 가쁜 속도를 좇았다. 김기명의 일기시는 지역이 거쳤던 그러한 세월의 역동 속에서 어른으로서, 아버지로서 겪은 삶을 아프게 노래한다. '1956년 흉년' '어제는 십 환인데 오늘은 오십 환' '총알 같이 오른 쌀값'이다. '칠월의 장대비'는 매질인 양 배고픈 이를 향해 꽂힌다. '찢어진 조국의 등살'에 문득문득 '어린 참새처럼 볼볼이 떨며' 죽어간 전우들이 떠오른다.


  악질 양조업자들이 날뛰던 시절이다. 서울의 정계는 한결같이 '건달들의 주지육림'만 펼친다. '고르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황금타령에' 날을 샌다. '앉아서 봐도 누어서 봐도' 가련한 '내 나라'다. 그는 "이 나라 민족에 빵도 좋고/시제 비누도 필요하지만/헌 폐를 씻고 쓸개를 빨래할 비누가 필요"하다고 외친다. 문학인에게도 고언을 던졌다. "낙엽과 같은 문장들/허수아비 같은 수필들/골작골작마다 추악들/단맛에만 도취한 글들." 자신의 것은 그와 달리 '차라리 새 출발한 지폐 모양으로 싱싱한 문장'이 되기를 바랐다.

  이렇듯 결기를 세웠던 시인이었건만, 되돌아서면 고스란히 가난한 아버지일 따름이다. "아버지 돈 돈 돈/간을 끓는 고소장이다/아버지는 정말 바보?/쌀이 떨어진 지 이주일째/아버지 돈 주세요." 나이 오십 줄에도 '가난병'을 벗어나지 못한 무기력한 남편. 먼저 간 어린 딸이 오래 앓고 누웠던, '지도처럼 찢어진 냉돌방'만 그를 반긴다. '뜨겁게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는 '설상가상의' 세월이었다.

  김기명의 일기시는 교과서 시들과는 거리가 있다. 거친 육성이다. 그런데 문학이란 참되게 살아가기 위한 안간힘이 아니던가. 글이 아니면 살아낼 힘을 갖지 못한 이의 울음이며 기도가 아니던가. 그의 작품은 내돌리기 위해 꾸민 여느 시와 다른 증언시다. 삶과 글이 하나로 옹근 생활시다. '오십의 나이에' 이르러서는 "다섯 번이나/남들을 속였느니라"고 되뇌었다. 역설적인 회한을 숨기지 않은 시줄이다. 어느 시인이 이렇듯 참된 자기 성찰에 이른 적이 있었던가. "내 죽는 날 혼이여/꽃에서 졸지 말아라"는 또 얼마나 아름답고 단호한 순명인가.

  유고집 머리글에서 시인의 아들은 "글을 쓰던 당신의 여읜 등이 너무도 그립습니다"라 적었다. 울음을 삼켰을 목소리다. 나 또한 어버이를 기억할 분들을 다른 세상으로 보내는 일이 더 잦아진 나이다. 흐트러지는 슬픔을 머리카락인 양 쓸어 올리는 버릇도 배웠다. 어느 낡은 책을 펼치다 '나를 위해서는 땀을, 겨레를 위해서는 눈물을, 나라를 위해서는 피를'이라 부끄러운 듯 써놓은 좌우명을 읽고 감격에 떨었던 적이 있다. 김기명의 시야말로 그런 좌우명을 몸에, 마음에 새기고 살았던 우리 어버이 세대의 아프나 자랑스러운 자화상이다.

<위 글은 국제신문 2016년 6월 30일(목)자 31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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