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칼럼] 최동호 석좌교수
[세계일보 칼럼] 최동호 석좌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6.05.30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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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채식주의자’ 반세기 숙원 풀다

  1·2·3부 유기적 연관성 가져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 돋보여

  동물적 탐욕·폭력성 형상화도

  한국문단엔 뛰어난 작가 많아

  목숨 건 작가적 탐구 가장 중요

  한강의 중편집 ‘채식주의자’가 세계적 권위를 가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작이 됐다. 한국 현대문학 반세기의 숙원을 푼 역사적 쾌거이다. 지난 50년 한국문학은 풍요로운 성과를 거두었지만 세계적으로 공인되지는 않았다. 노벨문학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일본에 비해 한국이 세계적인 문학상 수상자를 한 명도 내지 못했다는 것은 한국으로서는 심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언제나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최초의 관문을 뚫는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최근 문화적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가장 소망했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채식주의자’는 1부 ‘채식주의자’, 제2부 ‘몽고반점’, 3부 ‘나무 불꽃’ 등의 중편이 각각 독립적이면서 유기적인 연관성을 갖고 전체의 흐름을 형성한다. 주인공 영혜를 관찰하는 남편이 화자가 돼 서술되는 1부는 아홉 살 때 자신의 다리를 문 개를 아버지가 오토바이에 묶어 달리면서 죽이는 충격적 체험에서 비롯된 악몽의 연속으로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했는데, 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남편은 처가 사람들까지 동원해 이를 고치려 들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처형인 인혜의 집들이에서 아버지가 영혜의 입에 탕수육을 넣으려 하다가 이를 거부하는 영혜에게 폭력을 가하고 영혜는 그 자리에서 손목을 긋는다. 2부는 인혜의 남편인 비디오아티스트가 화자이다. 남편이 떠나가고 혼자 사는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아내에게서 듣고 영혜의 몸에 호기심을 느낀 인혜의 남편은 영혜를 찾아가 비디오작품의 모델이 되기를 간청한다. 그는 벌거벗은 영혜의 몸에 꽃을 페인팅하고 비디오를 찍지만,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도 보디페인팅을 하고 끝내 육체적 교접까지 하는 식물적이고 몽환적 에로티시즘을 보여준다. 3부는 영혜와 육체적 교접이 발각된 후 사라진 남편 대신 생계는 물론 병수발까지 해야 하는 인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영혜는 식음을 전폐하고, 링거조차 거부해 나뭇가지처럼 말라간다. 마침내 영혜는 병원을 찾아온 인혜에게 이제 곧 나무가 될 거라고 말한다. 단순히 말하면 이 소설은 외부의 폭력에 대해 극단적으로 저항하다가 나무가 돼 죽어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성과 동물적 폭력성에 대한 주인공의 거부는 궁극적으로는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로 해석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끈질긴 질문이 없다면 이 소설은 하나의 엽기적인 사건의 기록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나아가듯 공들여 서술된 시적 문장은 속삭이듯 독자에게 다가와 그들로 하여금 마치 자신이 사건 속의 주인공이 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전율적 아름다움을 발한다. 외국의 독자나 비평가들은 이 기묘한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소재의 충격성뿐만 아니라 주제의 보편성 획득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인데, 자신이 던진 질문을 끝까지 추구해 인간의 동물적 탐욕과 그 폭력성의 근원을 형상화한 것이 한강의 소설이다.

  현재 한국문단에는 한강에 못지않은 수준의 작가가 많다. 관건은 특수한 소재를 어떻게 보편적 공감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느냐에 있다. 세계문학의 첫 관문이 우리에게 활짝 열렸다. 지난해 표절 시비로 최악의 시련을 겪은 한국문학은 맨부커상을 계기로 상승세를 타고 세계적 문학상의 문을 힘차게 두드릴 것이다. 작가도 좁은 울타리 안에서의 문학을 벗어나 당당하게 넓고 큰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뛰어난 번역가 양성, 그리고 세계 시장 개척 등의 난제가 가로놓여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목숨을 건 작가적 탐구일 것이다. 대중적 상업주의를 넘어서는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문학의 근원적인 힘을 되살려 미래의 문학에 헌신하는 작가만이 세계적 명성과 보상을 함께 얻을 것이다. 소설의 죽음이 아니라 소설의 부활을 예감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위 글은 세계일보 2016년 5월 23일(월)자 30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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