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6.05.09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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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주 열사와 '최후의 결전'

  독립운동가 석정, 뛰어난 혁명가이자 노랫말 짓던 예술가…그의 희생 기억하자


  폿소리가 이어졌다. 총알이 바위를 때리고 말이 산비탈을 굴렀다. 5월 28일. 석정은 적정을 살피고 있었다. 골짜기로 적병 100여 명이 나타났다. 일행을 발견하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다른 대원들을 숨기기 위해 세 사람은 숲에서 나와 다른 길로 뛰기 시작했다. 최채는 산 위로 석정은 중턱으로 진광화는 아래로. 전투가 멎자 최채는 하진동과 함께 둘을 찾아 나섰다. 진광화는 전사했고 석정은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다. 먹지도 못하고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버티다 석정은 운명했다. 6월 3일. 두 사람은 열 손가락으로 땅을 파 그를 묻었다. 피눈물이 흥건한 흙과 돌로 위를 덮었다. 위대한 광복 열사의 마지막이었다.

  1942년에 있었던 일이다. 마흔두 살. 석정(石正)은 태항산 자락에서 순국한 윤세주 열사의 가명이다. 그는 1901년 밀양 내이동에서 났다. 열여덟 살 나이로 밀양의 기미만세의거를 이끌었다. 그가 만주로 피한 것을 뒤늦게 안 왜로는 궐석재판으로 열사에게 1년6월 형을 선고했다.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석정은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다. 벗 김원봉과 함께 무장 투쟁을 통한 직접적인 광복 항쟁을 결심하고 의열단을 조직했다. 1920년 1차 암살 파괴 계획을 세워 무기를 부산과 밀양으로 반입했다 체포되었다. 여덟 해에 걸친 옥살이를 겪었다. 1932년 가족 몰래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광복 항쟁에 더 깊숙이 뛰어들었다.

  열사는 한중합작으로 왜로에 대항해야 한다고 국민당을 설득했다.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를 세우게 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1기 학생 신분으로 입소해 훈련을 받았다. 그 뒤 석정은 반왜 항쟁 전선의 통일과 확대,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가 민족혁명당이었다. 1938년에는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훈련 주임을 맡았다. 1941년 북상한 조선의용대가 화북 태항산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1942년 3월부터 왜로와 만주국 군경 20개 사단 40만 명의 총공격을 받았다. 조선의용대 40여 명이 4개 분대로 나누어 탈출을 했다. 그 과정에서 열사는 장렬히 전사한 것이다.

  이즈음 한 연구자가 이육사 시 '청포도'의 '고달픈 몸으로/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한 '내가 바라는 손님'이 다름 아닌 열사를 뜻한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청포도'는 "지치고 쫓기는 혁명가들을 맞이하는 향연을 노래한 시"라 했다. 탁견이다. 육사의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 입학을 주선한 이가 석정이다. 그 또한 의열단원으로 17차례나 투옥된 끝에 원사했다.


  육사 어머니는 1908년에 순국한 의병장 허위 선생의 종질녀다. 동북항왜연군의 3로군 총참모장으로 이름 높았던 허형식 장군이 사촌 오라버니. 육사와 외당숙 사이다. 시 '광야'에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으로 표상된 이다. 육사에게 석정은 벗이자 스승이었다.

  윤세주 열사는 뛰어난 지도자며 전술가, 지행합일한 웅변가였지만 예술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대적 선전선무 활동에 역량을 발휘해 여러 격문, 논설을 발표했다. 손수 노랫말을 짓기도 했다. '최후의 결전'이 그것이다. 이 노래를 석정은 '바르샤바행진곡'에 맞추어 씩씩하게 부르게 했다. '최후의 결전을 맞으러 가자/생사적 운명의 판가리로/나가자 나가자 굳게 뭉치여/원쑤를 소탕하러 나가자//(후렴)총칼을 메고 결전의 길로/다 앞으로 동지들아/독립의 기발은 우리 앞에 날린다/다 앞으로 동무들아//무거운 쇠줄을 풀어헤치고/뼈속에 사무친 분을 풀자/삼천만 동포여 모두 뭉치자/승리는 우리를 재촉한다//(후렴).'

  '최후의 결전'은 조선의용대의 대표 군가 가운데 하나였다. 1980년대까지 지은이를 몰랐던 이 노랫말이 석정의 것이라는 사실은 연변 동포 학자가 밝혔다. 열사가 순국한 뒤 조선의용대 화북 지대는 조선의용군으로 바뀌어 중국공산당에 편입되었다. 우리의 토왜 광복 전쟁 노선은 새 국면으로 들어선 것이다. 석정이 숨지기 넉 달 앞서 동북항왜연군 총사령 조상지 장군이 절명하고, 두 달 뒤 허형식 장군도 순국했다. 만주국협화회 밀정 유치환이 조상지 장군을 한껏 조롱하고 꾸짖는 부왜시 '수'를 발표하고, 윤극영도 협화회 일로 바빴을 때다. 정부는 1982년 열사에게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열사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글이 있다. 1943년 6월 조선민족혁명당 기관지 '앞길'의 사설 한 자리. '석정 동지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조선 혁명을 위하여 온 힘을 다 쏟아 부으며 공헌하였다. 그의 일생은 환란 곤궁의 일생인 동시에, 분투 노력의 일생이었다. 백절불굴은 그의 용기이며, 정확 명석은 그의 이론이며, 세밀 주도는 그의 공작 계획이며, 겸허 화애는 그의 대인 관계이며, 폭포수와 같은 것은 그의 웅변이며, 불꽃 같은 것은 그의 정열이었다. 누구든지 혁명에 대하여 불충실하며, 공작에 나태하며, 민족을 위하여 희생하는 데 주저하는 자는, 석정 동지를 한번 생각할 때 자연히 참괴하게 되며 회오하게 될 것이다'.

<위 글은 국제신문 2016년 5월 5일 (목)자 27면에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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