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도민일보 칼럼] 안차수 교수
[경남도민일보 칼럼] 안차수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6.03.07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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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 성공과 실패를 넘어

  정치의 역할 보여준 9일간 무제한 토론…다수가 이견 묵살한 민주주의 현실 고발


  필리버스터가 끝이 났다. 용어는 들어봤지만 생전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47년 만에 부활했으니 대부분 젊은 사람들은 '저게 뭐지?'하며 신기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이유가 궁금했다. 법안을 막기 위해 야당이 저런 토론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생소했다. 토론이 시작되고 또 쉼 없이 계속되자 '저걸 언제까지 하려나?'라는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다. 한두 시간 토론해도 힘든데 6시간, 8시간, 10시간을 넘기고 먹지도 쉬지도 자지도 않고 계속하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저렇게 통과를 막으려고 하는 테러방지법이 무엇이기에 저럴까라는 호기심이 생겼다. 토론 내용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사생활 침해 등 법안의 문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 헌법과의 충돌, 국가 비상사태의 암울했던 역사, 국회의 기능, 정치의 역할 등 한국 민주주의와 민주화 역사가 여과 없이 총망라되었다.

  38명의 야당 국회의원들이 192시간 25분 동안 펼친 정치토론의 성적표는 어떨까? 목적대로라면 실패다. 저지하려던 법이 '셀프 중단' 후 원안통과 되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리버스터는 기록으로 보자면 대성공이다. 신기록을 이어가던 의원들의 토론 기록을 말하는 게 아니다. 국민의 관심과 호응 기록을 말하는 것이다.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의 소셜미디어 기록을 살펴보면 놀랍다. 열흘 동안 소셜미디어에서 언급된 필리버스터 글은 338만 건으로 2014년 4월 16일부터 열흘 동안 세월호 언급량 214만 건을 웃돌았으며, 24일 은수미는 하루 50만 건을 돌파해 2012년 박근혜 43만 건과 문재인 36만 건을 훨씬 웃도는 언급 수치를 보였다. 빅데이터 관측 이래 가장 짧은 시간 가장 뜨거운 정치적 퍼포먼스를 야당의원들이 필리버스터를 통해 구현했다는 평가다.

  필리버스터에 보인 기록적 호응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이전과 다른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 것은 분명하다.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9일간 무제한 토론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과정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소중한 시간을 제공했다.

  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 공정한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불공정한 것은 정확히 지적해 낸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자유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무엇이 억압과 구속인지 그리고 폭력과 야만인지는 쉽게 판별한다.

  필리버스터는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이상 징후이다. 이견과 반대가 수용되지 않고, 토론과 합의가 용납되지 않으며, 소수가 9일을 울며 외쳐야 지켜지는 민주주의라면 우선 멋진 공화국을 꿈꾸기 전에 전체주의나 파시즘을 염려해야 할 것이다. 전체주의를 누구보다 잘 꿰뚫어 본 한나 아렌트는 소통이 없는 민주주의는 조건 상실이며, 다수의 강제에 의한 권력은 폭력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치가 숭고한 이유는 의견을 말하기 때문이며 그 의견은 생각의 다름을 전제한다. 필리버스터를 중단한 것은 불만이다. 하지만 정치의 가능성을 보았다.

 

<위 글은 경남도민일보 2016년 3월 7일 (월)자 11면에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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