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6.03.0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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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근대 첫 어린이청소년 잡지 '학생동무'

  광복 후 학생교육 위해 뜻 있는 교사들 모여 청소년 매체 발간해 그 정신은 이어져 와


  근대 시기 부산에서 나온 어린이청소년 매체는 많지 않다. 흔한 꼴은 각급 학교에서 낸 교우지나 소식지다. 유래 깊은 학교에서는 해마다 또는 특별한 때에 맞춰 그들을 냈다. 세운 지 백 년을 넘는 동래고의 '교우회지', 개성고의 '금련', 동래여고의 '일신'이 대표적이다. 그들 속에는 학생 활동뿐 아니라 문인 교사나 뒷날 문인으로 자란 동문의 작품이 실려 예사롭게 넘길 수 없다. 

  그런데 이들은 학교 연결망 안에 든 읽는이를 상대로 낸 것이다. 달리 학교 바깥 일반 어린이청소년까지 상대로 낸 매체는 없었던 것일까. 1920, 30년대 동래소년회나 소년동맹의 회지·회람지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실체를 볼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남아 있는, 부산 근대 첫 어린이청소년 잡지는 을유광복 뒤인 1946년 3월에 나온 '학생동무'다. 사무실을 초량동에 둔 학생동무사에서 냈다. 대표는 산청 출신 국어학자 유열이었다. 밀양에서 교사로 일하다 광복 뒤 부산대학교로 자리를 옮긴 그다. 유열은 서둘러 '한얼몯음'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한얼이란 배달겨레가 예부터 지니고 있었던 겨레 정신. 겨레를 하나로 바르고 크게 이끄는 한얼을 등대처럼 좇으며 우리 겨레가 굳센 나라를 세우고 힘차게 자라기 바라는 뜻을 담은 이름이었다. 거기에서는 여러 가지 사업을 펼쳤다. 그 가운데 가장 공을 들인 일이 한글 교육과 어린이청소년 교양이었다.

  기관지 '한얼'도 냈다. 각급 학교 한글 교육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어린이청소년 교양을 위해서는 배달학원을 세웠다. 재학생뿐 아니라 학교 혜택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청소년을 대상으로 과외 공부와 계몽을 위해 중학 과정의 밤배움을 마련한 것이다. 여자부 남자부로 나누고 음악대까지 만들었다. 중심에 둔 교과는 마땅히 우리 말글과 나라 역사였다. 그 일을 위해 뜻있는 교사들이 나섰다. 유열이 앞장서고 장삼식에다 박지홍 박종우 정신득 정용수와 같은 이가 그들이다. 그리고 배달학원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순보로 낸 것이 '학생동무'다. '한얼'의 동생뻘 되는 잡지였던 셈이다.


  오늘날 '학생동무'는 3월에 낸 제1호에 이어 4월의 제2호, 5월의 제3호까지 남아 있다. 순간을 뜻했으나 월간에 가까웠다. 재미있는 점은 유인본 제1집이 읽을 수 없는 상태였던 탓에 제3호 인쇄본에 되묶어 냈다는 사실이다. 10쪽에서 14쪽에 걸치는 얇은 잡지 '학생동무'는 표제를 가로풀어쓰기로 '하ㄱ새ㅇㄷㅗㅇㅁㅜ'라 적었다. 속살에는 큐리 주시경 안중근과 같은 분의 위인전을 실었다. 한글 역사 과학 지식에다 독자문예 난도 더했다. 이해타산 밝은 이들이 왜인의 적산을 얻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세월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뜻있는 교사와 어린이청소년은 광복의 기쁨과 앞날의 꿈을 순연하게 가꾸었다. 

  '학생동무'가 몇 호까지 나왔는지 확인은 어렵다. 다만 1946년 12월 '한얼몯음'은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영남국어학회'로 넓혀졌다. 그에 앞서 '학생동무' 발간이 멈추었을 것이다. 배달학원도 마찬가지였을 듯. '학생동무'와 비슷한 시기 서울에서는 '주간 소학생'이 나왔다. 대구에서는 '새싹' '아동'을 냈다. '학생동무'는 그들과 규모와 지속성에서 견줄 수 없을 만큼 초라하다. 그럼에도 뜻만큼은 더 윗길에 놓인다 할 수 있다. '학생동무'가 디딤돌이 되어 그 뒤 전쟁기 손동인이 엮은 '꽃수레'나 김용호의 '파랑새'와 같은 부산 지역 어린이청소년 잡지 발간의 전통이 이어질 수 있었다.

  '한얼몯음'과 '학생동무'를 이끌었던 유열은 1947년 6월 서울로 올라갔다 전쟁 참화 속에서 월북했다. 국어학과 대종교라는 같은 뿌리를 일깨워 준 스승 이극로나 정열모의 뜻에 따랐던 까닭이었을까. 다행스러운 점은 경남 부산 지역 국어학자로서 월북했던 이 가운데서 제거당한 기장의 김두봉과 달리 의령 이극로와 함께 그는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교수로 북한 국어학 발전과 말글 정책 결정에 중요한 몫을 그가 맡았다. 2000년 광복절 남북이산가족 1차 만남 때 방문단의 한 사람으로 서울에 내려와 전쟁 때 헤어졌다 환갑을 넘긴 부산의 딸을 껴안고 흐느꼈던 기억도 새삼스럽다.

  광복 뒤 첫 어린이날인 1946년 5월 5일, 학생동무사는 경남도 부산시 학무과와 함께 동요·동화 '콩쿠르'를 열었다. 5000명이나 되는 학생이 아침 낮 두 차례에 걸친 행사를 즐겼다. 그들이 하나로, 바르고 큰 나라 동량으로 자라기를 꿈꾸며 그 일을 거들었을 교사들은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다. 영상매체의 가벼움과 속도에 쫓기며 '한얼'은커녕 '얼'조차 내보낸 듯한 오늘날 현실이다. 그럼에도 '한얼몯음'의 뜻과 추억은 '학생동무'를 읽었거나 그날 행사에 참가했던 지역 어린이청소년의 삶 속에서 오래 살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들조차 어느새 가물가물 환한 팔순 나이를 다 넘어섰겠다.

 

<위 글은 국제신문 2016년 3월 3일 (목)자 31면에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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