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칼럼] 최동호 석좌교수
[경인일보 칼럼] 최동호 석좌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5.11.03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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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호의 시인정조… 수원화성·18] 지지대에서 화성을 바라보다

  아버지 그리워 고갯길 걸음 멈춰
  길에 노송 심고 백성 풍요를 빌어

  현재 수원시와 의왕시의 경계에 있는 지지대고개는 정조의 고사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지지’란 공자가 노(魯)나라를 떠날 때 ‘지지오행야’(遲遲吾行也)라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 모국을 떠나는 공자처럼 차마 발걸음을 떼기 어렵다는 뜻이다. 현릉원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정조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정조를 위해 수원부민들이 대를 만들어 그 마음을 위로했다는 말도 전한다. 채제공의 ‘병진축(1796, 丙辰軸)의 시운(詩韻)에 화답’한 시 중에서 ‘지지대(遲遲臺)에서 화성을 바라보다’에 화답한 시다.

  지지대 앞길에 말고삐를 멈추고 / 駐轡臺前路
  멀리 있는 화성 북쪽을 바라보니 / 迢迢望華陰
  푸른 논은 일천 이랑을 출렁이고 / 稻秔千畝闢
  뽕나무 아래 일만 가호가 깊도다 / 桑柘萬家深
  철벽처럼 굳건한 성은 이미 보았고 / 已見城爲鐵
  재물을 사양하는 풍속을 들으니 / 思聞俗讓金
  선왕께서 풍족하게 하라는 가르침 / 先王富敎意
  옛 훈풍금 한 곡조를 생각하노라 / 一曲想薰琴

  정조가 지지대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화성을 바라보니 만물은 푸르게 자라고 있고, 백성들은 재물을 다투지 아니하고, 성벽은 철벽과 같으니 순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남풍시’를 지어 백성들의 풍요를 빈 것처럼 자신도 그러한 태평성대를 노래하고 싶다는 뜻을 담은 것이 위의 시다.

  정조는 1789년 4월 현릉원의 식목관에게 돈 천 냥을 줘 지지대 고개를 비롯해 자신이 지나는 길에 소나무 500그루와 능수버들 40그루를 심게 했다.

  1794년부터 1797년 사이에는 수원읍 내외에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단풍 1섬, 솔씨 2섬, 뽕나무 2.5섬, 밤 2섬, 상수리 42.13섬, 탱자 1섬을 비롯해 자두, 복숭아, 살구 등 기타 과수와 꽃나무 묘목 등을 파종했다고 한다.

  오늘날 수원의 명물 노송지대는 이 때 식목된 나무들에 의한 것이라고 하니 멀리 내다보는 정조의 식견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다.

  중국의 제왕 중 가장 이상적으로 삼은 순임금을 떠올리며 화성의 건설은 물론 치수 식목사업을 하고 백성들이 풍족하게 살기를 소망하고 이를 실천했다는 것은 단견에 사로잡힌 오늘의 정치인들에게도 커다란 모범이 될 것이다.

  / 시인 최동호 교수

<위 글은 경인일보 2015년 11월 2일 (월)자에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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