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한국경제] 정일근 교수
[국제신문, 한국경제] 정일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5.10.29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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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30주년 맞아 시집 '소금 성자' 출간

 

10구체 향가처럼 짧은 시어로 서정의 여백

  정일근 시인 '소금 성자'

  - 등단 30년 맞아 12번째 시집

  - 인세 전액 네팔지진 구호 내놔

  - "윽박지르지도 요구도 않고

  - 독자가 빈 공간 완성하게 해"

  "신라 사람들이 지은 10구체 향가를 많이 생각합니다. 10구체 향가가 시를 쓰는 내 마음에 들어와 있어요."

  정일근 시인에게 10구체 향가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10줄 안팎으로 짧게 쓰는" 긴장감 어린 형식미가 그 핵심이다. 10행을 채 넘지 않도록, 깎아내고 덜어낸 간결한 시행에서 생기가 돋아나 독자에게 닿는 상큼한 광경을 그는 1000년 전의 향가에서 본 듯하다.

  '고추밭에 고추가 달린다. 고추는 주인을 닮는다며 나릿나릿 달린다. 서창 장날 천 원 주고 사다 심은 고추 모종이 달린다. 고추꽃이 달린다. 별같이 하얗고 착한 꽃이 달린다. 어머니에게 나는 첫 고추, 고추꽃 일어 고추 달고 달린다. 은현리에 고추가 달린다. 풋고추가 달린다. 아삭이 고추가 달린다…'(시집 '소금 성자'에 실은 '고추가 달린다' 중)


   
 
  고추가 탐스럽게 열린 모습 같기도 하고, 잘 자란 아삭이고추 꽈리고추들이 은현리 마을을 뛰어다니는 듯한 생기 넘치는 모습 같기도 한데 이 시는 7행짜리 짧은 시다.

  정일근 시인이 열두 번째 시집 '소금 성자'(산지니 펴냄)을 내놓았다.

  "경남대 4학년에 다니던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가 당선되면서 저는 시인이 되었지요. 올해로 30년입니다. 때마침 운이 좋아 지금 모교 경남대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으니 이번 시집은 제겐 참 뜻깊네요."

  '모두 다 받아줘서 바다라고 했다. 마침내 원자력발전소까지 받아준 바다가 말한다. 봐라봐라, 봐라봐라, 이 바다 사람이 다 받아야 할 밥상이다'('바다의 적바림'·15 전문)

  '쇠숟가락으로 온기 먼저 담겨 오는 민물새우뭇국 받아들고 / 남루한 가족 모여 따뜻하게 먹는 저녁이 있었다 / 여흘여흘 흘러가던 저녁강 깊어지며 비로소 잠드는데 / 기다릴 사람 돌아올 사람 없지만 / 바람길 따라 에두른 돌담 위로 노란 등불 맑게 켜지는 밤이 있었다'('수세미꽃이 있는 풍경' 전문)

  10구체 향가의 마음을 생각하며 쓴 짧은 시는 "독자를 윽박지르지도 않고,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요구하거나 이끌려고 들지도 않고, 여백을 남겨 그걸 독자가 완성하도록" 하는 마음으로 썼다고 그는 말했다.


  "2000년에 히말라야를 다녀왔죠. 그때 네팔에서 순수한 아이들을 만나 마음이 참 좋았어요." 그는 등단 30년을 맞아 펴낸 이 시집의 인세 전액을 대한적십자사 네팔 지진피해 구호성금으로 내놓는다. '소금 성자'는 입소문 덕분인지 출간 14일 만에 2쇄를 찍었다. 은현리 고추, 밀양 얼음골사과도 작은 씨앗에서 시작했음을 생각하며 힘을 보탠다는 마음이다.

  '이 가을 가장 뜨거운 것은 사과 씨앗이다 / 어제의 사과에서 몸을 받아 오늘의 사과를 만들어낸 둥근 목숨 스스로 곡진하여 / 그 열기 어찌할 수 없어 껍질째 빨갛게 끓는다 / 밀양 얼음골 십만여 평 사과바다가 씨앗 하나로 창창히 깊어지고 / 씨앗 하나로 뜨거워져 넘친다'('끓는 사과' 전문)

<위 글은 국제신문 2015년 10월 29일(목)자 19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정일근 "시인은 풍경을 제시할 뿐…시는 독자가 완성하죠"

  등단 30주년 맞아 시집 '소금 성자' 출간한 정일근 시인
 

  ‘어머니의 그륵’ ‘감지(紺紙)의 사랑’ 등 서정성 짙은 시를 써온 정일근 시인(57·경남대 교수·사진)이 등단 30주년을 맞아 12번째 시집 《소금 성자》(산지니)를 출간했다.

  새 시집에 실린 56편의 시는 3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시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구체적인 삶의 장면 속에서 희망을 찾는 그는 표제작에서 히말라야의 한 노인과 소금을 노래한다.

  ‘소금을 신이 내려주는 생명의 선물로 받아/소금을 순금보다 소중하게 모시며/자신의 당나귀와 평등하게 나눠 먹는 사람이 있다.’ (‘소금 성자’ 부분)

  구모룡 문학평론가는 시의 주인공과 소금의 관계를 시인과 시의 관계로 포착한다. 소금처럼 모든 것이 흔한 세상에서 흔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시인의 자세가 빛나는 시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시인이 창조해낸 세계 속에서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시의 배열을 통해 이미지의 전환을 이뤄낸다. 그는 사과 청어 수박 앵두 같은 먹거리에서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바다와 경주 남산에선 기다림과 그리움을 그린다.

  쉬운 시어로 짧게 쓴 것도 특징이다. ‘최상의 맛은 한 점이면 족하다//그것이 맛의 처음이며 끝이다//행여 욕심에 한 점 더 청하지 마라/그때부터 맛은 식탐일 뿐이니’(‘맛’ 부분) 같은 시에선 선시(禪詩)의 향기가 느껴진다. 정 시인은 “길게 말하는 시일수록 독자들이 외면하는 것을 느꼈다”며 “독자들이 생각할 여백을 두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인은 풍경을 제시할 뿐, 시는 결국 독자가 완성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시인으로 30년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사회와 독자들 덕분”이라며 “시인은 독자에게 보답하는 마음, 사회적 책무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시집을 부산에 있는 출판사에서 낸 것도 그래서다. 정 시인은 “그동안 시한테 윽박만 지른 것 같은데 30년이 되고 나니 이젠 시가 하는 말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위 글은 한국경제 2015년 10월 29일(목)자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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