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칼럼] 최동호 석좌교수
[경인일보 칼럼] 최동호 석좌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5.09.14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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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대 고개에서 아버님 현릉원을 바라보며

  아버지 재전서 아침문안 올리리

  참배후 돌아오는 발걸음 무거워

  어버이 잠자리 봐드리는 효 간절

  사도세자의 묘를 1789년 화성으로 옮기고 이를 현릉원이라 칭한 정조는 해마다 새해 정월 아버지에게 문안을 드리고 친제를 올렸다. 특히 1795년 을묘원행 이후에는 더욱 자주 현릉원을 방문하고 때론 홀로 오열했다. 뜻대로 운영되지 않는 국정을 하소연하고 싶은 것도 많았으리라.

  이 시는 현릉원에 가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초상을 참배하고 가랑비에 젖어 돌아오다가 지지대 고개에서 현릉원을 돌아보며 쓴 것이라고 정조는 자서에 기록하고 있다. 비로 인해 길을 가지 못하고 하룻밤을 묵고 새벽에 길을 가게 되니 아버지를 사모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혼정신성의 다 못하고 사모하니 / 晨昏不盡慕

  이 날에 다시 화성을 찾아와 본다 / 此日又華城

  침원에는 가랑비 부슬부슬 내리고 / 霢霂寢園雨

  재전 앞을 배회하는 마음이로구나 / 徘徊齊殿情

  사흘 밤을 견디기는 어려웠으나 / 若爲三夜宿

  그래도 초상화 한 장을 얻었도다 / 猶有七分成

  지지대 고개에서 머리를 돌려 보니 / 矯首遲遲路

  바라보는 눈길에 오운이 떠오른다 / 梧雲望裏生

  아직 사도세자 영정 초본은 남아 있지만, 이미 빛을 발해 제대로 알아볼 수 없어 이를 모사한 어진을 현릉원 재전에 모셔 놓고 있었다.

  저녁이면 어버이의 잠자리를 봐 드리고 새벽이면 어버이에게 문안드리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예를 표하기 위해 화성에 온 것을 첫 행에서 말한 뒤, 다음으로는 가랑비 내리는 재전 앞을 배회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초상화 한 장을 겨우 모사하여 그려 놓고 머리를 돌려 도성으로 향하지만, 지지대 고개에 이르러서도 차마 돌아서지 못하는 것을 마지막 구절에서 표현했다.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데 오운(梧雲)이 떠오른다는 마지막 구절은 창오(蒼梧)에서 붕어한 순임금을 그곳에서 장사 지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오운은 왕의 능침을 말한다.

  후서에서 정조는 사도세자가 군복을 입고 마지막 온천 갔던 일을 회고한 것으로 군복을 입고 현릉원을 참배하는 것은 그만큼 어버이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위 글은 경인일보 2015년 9월 14일(월)자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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