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5.09.10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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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 헌책가게 정 씨

  항왜지사·개척농 등 만주 재중동포들, 여전히 신산한 삶

  연길 헌책가게 정씨 작은 행복 지켜지길


  오늘도 정 씨 헌책가게는 자리를 깔았다. 연길예술극장 건너 쪽 길가. 여우비 내린 뒤 한낮이었다. 늘 그렇듯이 늘어놓은 책상자들이 풀죽은 모습으로 놓여 있다. 그 뒤 계단 위에서는 장기를 두며 보며 다섯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손이 갈 책은 한결같이 뜨이질 않는다. 열일곱 개 작은 종이상자에 등을 내보인 채 빼곡이 꽂힌 책은 모두 오백 권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 가운데 여섯 개가 한글책 상자다. 두 권을 골라 일어서니 장기판에서 몸을 뺀 정 씨가 웃으며 다가왔다.

  연길예술극장 자리는 본디 1924년에 만든 길림성 교도소 터였다. 1931년 만주침략을 저지른 뒤 왜로가 빼앗아 연길감옥이라 불렀다. 1935년 단오, 이곳에서 파옥항쟁이 있었다. 왜로 감옥장을 죽이고 감옥문을 열어 수감자들을 해방시킨 것이다. 지금은 극장 너른 터에 '연길감옥항왜투쟁기념비'를 세워 그 내력을 일깨우고 있다. 정 씨가 이곳에 헌책가게를 편 지도 십 년을 넘었다. 일곱 해 동안 가까운 하남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다 더 쪼그라들어 2005년부터 지금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1970년생이니 마흔여섯. 이름은 정진국. 그는 할아버지 고향이 평안도 순천인지 전라도 순천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만주에 살고 있는 우리 재중동포는 크게 네 유형의 후손이 중심이다. 곧 19세기 후반 북한 쪽에서 넘어 왔던 농민, 20세기 초반 항왜의열 활동을 위해 건너온 지사와 그 가족, 1932년 왜로의 만주국 수립 이후 들어온 상인이나 부왜기구 하급 관리, 그리고 1937년 중국대륙침략전쟁 뒤부터 군량미 생산을 위한 대량 이주 책략으로 옮겨진 남한의 이른바 개척농이 그들이다. 

  소수를 젖혀 둔 그들 거의 모두는 나라가 지켜 주고 먹여 주지 못한 탓에 겪지 않아도 될 고초와 비통을 감내했던 이들이다. 그러니 우리는 재중동포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정 씨 할아버지도 이른바 개척농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에 중퇴를 했다. 뇌전증 탓이었다. 지금은 열여섯 살 딸을 둔 가장이다. 딸을 낳을 때 병을 얻어 아내도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낙담해 술로 세월을 보내다 당뇨마저 깊어졌다. 그 탓에 왼쪽 엄지손가락을 잃었다.

  정 씨가 헌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처남 때문이었다. 때밀이로, 양말장사로 지내다 먼저 헌책방을 하던 처남이 1998년 한국으로 건너가면서 책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처남은 아홉 해 만에 다시 돌아와 헌책방을 계속했다. 네 형제 가운데 둘째 형도 그의 권유로 헌책가게를 열었다. 한창 때는 이들 정 씨 일가 세 사람이 연길 동포 헌책 유통의 중심을 이루었다. 요즘은 한 달에 2000위안, 우리 돈 36만 원 정도를 번다. 일반 공무원 월급의 가웃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나라에서 두 내외에게 주는 장애인 수당으로 전기세, 물세는 충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늘어나는 교육비에 치인 채, 그날 벌어 그날 먹을 찬거리를 해결하는 사정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그의 몸과 그를 둘러싼 환경은 온통 덕지덕지 상처 투성이다. 그런 정 씨에게 아픔을 덧나게 하는 잘못을 나도 저질렀다. 관자놀이 쪽에 생긴 불그스럼한 흉터가 그것이다. 지난 오월 초순 가게를 처음 찾았을 때다. 집에까지 함께 가 그동안 묵고 있었던 책 한 묶음을 내 손에 넣었다.

  모처럼 꽤나 많은 책값이 그의 손에 쥐여진 날이었다. 그 다음 번에 만났을 때, 얼굴에 딱지가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니 내가 처음 들렀던 그날 사달이 났다는 게 아닌가. 모처럼 저녁에 가족 외식도 하고 맥주까지 두 병 마시고 돌아가다 뇌전증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때 생긴 상처였다. 뜻하지 않았지만 나로 말미암아 비롯된 일이 틀림없었다. 그날 뒤로 미안한 마음은 나에게도 한 흉터처럼 돋아 올랐다.

  세상 어느 곳이나 제 한 몸에 크고 작은 상처를 감거나 아로새기며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가 지닌 상처는 너무 크고 깊다. 여름 내내 무리지어 모아산을 오갔을 한국 여행객들 눈길 닿지 않는 안쪽 길가에 정 씨 가게가 있다. 거기서 철둑을 넘어 십 분을 걸어가면 낡은 아파트에 닿는다. 이 층 십오 평 남짓한 곳. 곤고한 그와 가족이 사는 집이다. 딸이 자라 유치원 교사나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지닌 그다. 그런 기쁨을 생전에 누릴 수 있을까.

  비오는 날을 빼곤 거의 한 해 내내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가게를 지키는 그다. 제대로 된 당뇨 치료나 조섭은 꿈도 못 꿀 일. 연길감옥 옛터 맞은 쪽 한길에 그는 꼼짝없이 갇힌 신세다. 아마 몸져눕기 앞까지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리라. 화려한 네온사인의 시대, 어쩌면 그는 가는 불빛을 태우는 필라멘트 백열등과 같다.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찬 그가 언제까지 아내와 딸을 밝혀줄 수 있을 것인가. 오늘은 돌아서는 걸음에 정 씨를 위해 포도 몇 송이를 샀다. 알이 탱탱했다.

<위 글은 국제신문 2015년 9월 10일(목)자 31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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