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일보 칼럼] 정일근 교수
[경상일보 칼럼] 정일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5.08.2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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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버릴 줄을 알아야 더 큰 것을 얻는 법

  산더미 같은 짐을 싣고 떠나기보다는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여유 가져보길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때쯤 저는 남쪽 바다 먼 섬에 머물고 있을 것입니다. 비올 확률이 높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습니다. 아마 비를 맞으며 섬의 높은 곳에 자리한, 불을 밝힌 지 100년이 지난 등대로 가는 외길을 혼자 걸어가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칠팔월의 지독한 불볕더위를 지나오며 뼛속까지 흠뻑 젖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섬에서 오랜 만에 산업도시 산성비가 아닌, 맑고 찬비로 낡은 부대자루인 이 육신을 식히고 있을 것입니다.
 
  한대수의 노래 ‘행복의 나라로’를 흥얼거리며, 낡은 여행가방을 꾸리며 알았습니다. 저는 참 많은 것을 버리지 못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가방이 폭발할 듯이 꾸렸습니다. 돌아오면 여행가방 속에 챙겨간 많은 것이 사용하지 않은 채 남아 있곤 했습니다. 그건 일종의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여행이란 ‘탈출구’를 찾아 떠나며, 일상을 벗어나면 맞닥뜨릴 불편에 대해 저는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국제공항에서 만나던 풍경이 떠오릅니다. 돌아오지 않을 듯 산더미 같은 짐을 비행기에 싣고 떠나는 사람들; 그건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을 앞두고 제가 제일 먼저 챙긴 것은 매일 챙겨먹어야 하는 약들이 아니라 책이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제 마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책 한 권이었습니다.

  ‘나는 혼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자신에 대해 말을 한다거나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거나, 나의 이름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바로 내가 지닌 것 중에서 그 무엇인가 가장 귀중한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라는 생각을 나는 늘 생각해왔다.’

  그 책은 프랑스의 철학자며 작가인 ‘쟝 그르니에’의 ‘섬’이란 에세이집입니다. 인용한 글은 그의 ‘케르겔렌 군도’의 첫 구절입니다. 이십대에 밑줄을 쳐놓고 그런 여행을 동경해왔습니다만, 저는 간직할 비밀이 없이 요란하게 살고 있습니다. 아마 여행가방을 넘쳐나듯 꾸린 것 역시 ‘혼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나 불편에 대한 공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볍게 떠나기 위해 많은 것을 솎아내야 하는 것이 여행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과일농사를 짓는 분들은 압니다. 나무에 열리는 열매를 다 챙길 수 없는 것이 과수 농사법입니다. 과일은 열매솎기를 해야 성공합니다. 버릴 줄 알아야 더 큰 것을 얻는 것이 자연이나 사람에게 유효한 가르침입니다. 지금, 당신의 가방이나 서랍을 열어보십시오. 솎아낼 것이 얼마나 있는지 당신의 눈으로 확인해보시길 권합니다. 우리, 참 많은 것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잡동사니 꼴입니다.

  저는 빈 가방을 들고 푸른 바다를 건너 섬으로 떠날 것입니다. 빈 공책을 들고 가 쟝 그르니에의 글들을 필사할 것입니다. 가벼워지기 위해 떠나는 여행인 만큼 녹슨 정신을 벼리고 와야겠습니다. 머릿속에 기억하는 것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고 그러나 너무나 많은 것을 짐처럼 지고 살아가는 저를 반성하고 올 것입니다.

  ‘혼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사는 즐거움과 자유가 행복입니다. 연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휴대전화는 꺼놓고 있을 것입니다. 인연에 묶인 질긴 줄을 끊고 편안하게 흘러가는 쪽배 같은 여유를 그 섬에서 다시 배워야겠습니다. 섬에서 돌아와서 만난다면, 당신 눈에 제가 편안해보이기를 바랍니다. 부디.

<위 글은 경상일보 2015년 8월 21일(금)자 19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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