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5.03.19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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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나라' 동래지사와 박문하

 

  우하 박문하(1918~1975)는 굽이 많은 삶을 살다 간 수필가다.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뒤, 비통을 참지 못하다 마침내 자결에 이르렀던 아버지를 둔 유복자인 그다. 아버지의 의기를 이어 받은 형 문희, 문호에다 누나 박차정 열사를 모두 광복 항쟁과 역사의 격랑 속에 떠내려 보낸 집안의 막내였다. 그 또한 가난과 핍박을 버릇처럼 견디며 자랐다. 누나의 유일한 자전 소설 '철야'에서 박문하는 열사에게 밥을 달라 울며 조르다 혼이 나 잠드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누나는 왜경의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끌고 1930년 문희 오라버니가 있는 중국으로 건너갔다. 동래에 남은 어린 그가 한 일은 '별나라' 동래지사 운영이었다. 주소는 동래 칠산동 319-1번지. 오늘날 박차정 열사 생가로 복원이 이루어진 곳이다. '별나라'는 '나라잃은시대' 대표적인 어린이 잡지였다. 1926년 6월부터 1935년 2월까지 나왔다. 한때 구독자가 만 천을 넘었던 영향력 큰 매체였다. 여러 차례 정간, 압수, 발매 금지를 당했다. 발간 십 년에 80권밖에 내지 못한 사실이 그 점을 잘 말해 준다. 

  그런데 그러한 '별나라'의 수난은 고스란히 1920, 1930년대 경남·부산 지역 어린이문학인이 겪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름이 알려진 이주홍·권환·서덕출·신고송은 물론, 세상이 잘 모르는 엄흥섭·이성홍·김병호·이구월·양우정·손풍산·강로향·정상규·남대우·김형두에 이르는 이들. 그들의 주요 무대가 '별나라'였고, '별나라'의 중심 글쓴이 또한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 맨 뒷자리에 박문하가 놓인다. 폐간을 앞둔 1933년과 1934년 두 해에 걸쳐 '별나라' 지사장을 맡은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첫 작품인 동시 '우리들의 새끼기차'를 1934년 4월호에 실었다. 새끼기차란 시골 아이들이 새끼줄을 길게 두르고 기차 흉내를 내면서 타고 노는 놀이다. 거기서 박문하는 지게꾼 동무들에게 모두 모여 그 기차를 탄 채 섬나라 대판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면서 그곳을 "한 조각의 삯돈에/팔린 놈 되어/왼종일을 소와 같이/일하고 있는/우리들의 형님들/있는 곳"이라 썼다. 다른 나라에서 경제적으로, 민족적으로 극악한 차별 아래 일하고 있었던 겨레에 대한 열일곱 살 박문하의 당찬 마음자리가 담긴 작품이다. 형과 누나의 영향을 받은 그의 현실 이해가 오롯하다. 

  1934년, 박문하는 핍박과 감시를 견딜 수 없어 문호 형과 함께 맏형, 누나가 있는 상해로 건너갔다. 거기서 왜경에 체포되어 문호 형은 옥사하고, 그는 두 해 남짓 고초를 겪었다. 기댈 곳 없었던 박문하는 운문사로 들어가 승복을 입기도 했다. 그러다 생계를 좇아 의원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첫사랑과 같았던 문학을 묻은 것이다. 그런데 그가 '별나라' 동래지사를 꾸렸다는 사실이 갖는 뜻은 예사롭지 않다. 왜냐하면 그 무렵 '별나라' 지사는 해당 지역 청소년, 청년 조직 활동의 합법적·비합법적 활동 장소였기 때문이다.


  '별나라' 동래지사 또한 동래 지역 청소년, 청년 조직과 그 활동가의 항거와 고통의 속살을 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속에는 누나의 '철야' 정신이 녹아 있고, 동래경찰서 유치장을 집처럼 들나들었던 형의 뒷모습이 녹아 있다. 동맹휴교를 모의하고 결행하며 지역 항쟁의 불씨를 지켰던 동래고보 학생들의 은밀한 하부 독서회 조직 활동을 껴안고 있다. 부산포와는 다른 1920, 1930년대 동래 지역 청소년, 청년의 집단적 고통과 잠행의 정신을 박문하의 '별나라' 동래지사는 표상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그것은 박문하에 앞섰던 경남·부산 어린이문학인의 활동과 매체 투쟁의 마지막 매듭이라는 뜻까지 지닌다. '나라잃은시대' 우리의 어린이·청소년 문학사에서 경남·부산은 현실주의 어린이문학을 내걸었던 대표 지역이다. 그로 말미암아 여느 곳과 달리 많은 개인적 위해와 고초를 겪었다. 경남·부산 지역 어린이문학인의 위상과 비중이 유달랐던 '별나라'다. 그들의 고난스러웠던 걸음길을 거꾸로 찾아 들어서는 든든한 실마리가 박문하의 '별나라' 동래지사일 수 있다.

  사소한 기록이고 작은 사실인 듯 보이지만 살피기에 따라 큰 진실과 무거운 뜻을 담은 경우가 적지 않다. '별나라' 동래지사가 좋은 본보기다. 안동 이육사 형제의 의로운 내력에 버금가는 자리에 동래 박문하 형제의 것이 있다. 두 집안 모두 의열단 항쟁으로 가족을 잃었고, 북으로 올라간 형제를 둔 공통점이 있다. 

  박문하가 지사를 맡았던 '별나라'를 오늘날 나라 안에서 가장 많이 간수하고 있는 곳은 흥미롭게도 이주홍문학관이다. 빠진 데가 있어 아쉽지만, 모두 갖추었더라면 근대 출판문화재로 오롯이 지정되었을 잡지다. 박문하가 일했던 민중의원과 이주홍문학관의 직선거리는 1킬로미터쯤 될까. 이주홍과 박문하 둘은 이승에서 친교가 두터웠다. 아마 저승에서도 같으리라.

<위 글은 국제신문 2015년 3월 19일(목)자 31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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