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5.01.0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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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독배를 깨뜨리며

 
  그가 먼 전화기 끝에서 어깨를 쳤다. 세월호 참사로 두 철을 미루었던 늦은 답사차 학생들과 진주성을 거닐고 있을 때다. 이십 년에 가까운 옛날에 듣던 목소리였다. 인천 아들네 집에 얹혀 산 지가 1년을 넘겼다고 했다. 손자를 보며 지내는 여느 할아버지와 다르지 않은 삶이리라. 그는 일찍이 대구 헌책방 나들이 길에서 맞닥뜨려 알게 된 이다. 별다른 일자리가 없이 대구에서 쓸 만한 옛책을 사서 부산에서 넘기곤 하는 듯싶었다. 헌책방 귀동냥으로 드문드문 만나곤 하던 그가 어느 날 반여동 자신의 집에 있는 책을 처분해 달라며 부탁을 했다. 몇 묶음의 책은 내가 챙기고, 나머지는 내가 아는 헌책방에 소개해 준 게 그와 만난 마지막이었다. 그런 그가 문득 기억 먼 바깥에서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어떻게 내 시집 출판 소식을 들었다며 그는 반가워했다. 나는 보내주마고 약속을 했다. 그런 다음 내친 김에 그에게 자술 이력서를 부탁했다. 뒷날 쓸 일이 있을 것 같았던 까닭이다. 사실 그는 1960년대 서울 모 신문사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어 문학 활동을 했던 이다. 부산문인협회 회원이 50명을 넘지 않았던 시절이다. 시조 시인이래야 고두동·서정봉·장응두·김민부가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나라 잃은 시대에 문학을 시작했던 구세대가 중심이었다. 그런 속에서 김민부와 함께 드문 신진세대였던 그다. 그럼에도 1970년대 초반까지 작품을 선보이다 그는 사라졌다. 그와 교유를 나누고 있을 때 나는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체 하지 않았다. 먼 문학 선배에 대한 나름의 예를 그렇게 갖춘 셈이다.

  해끝에 기다리던 그의 편지가 왔다. 자신의 처지를 "망팔십 병후 회복기"라 썼다. 1937년생이니 올해 78살이다. 무슨 몹쓸 병을 앓았던 것인가. 자신의 문학에 대해서는 "긴 긴 자득의 시단 실종"이라 적었다. 스스로 문학사회에서 잊혔음을 그렇게 고백하고 있었다. 그는 문단에 나선 뒤 지역 방송국에서 구성작가로 여러 해 일했다. 거기를 나온 다음부터 문학 활동도 접었다. 그리고 여러 일자리를 거쳤다. 상점 간판이나 문을 꾸미는 상업미술에다 철학관 운영, 종내에는 작은 골동가게까지 숨차게 쫓았다. 그의 표현대로 '십전십패'의 삶이었다. 어둡고 긴 장년의 골짜기를 거치면서 그나마 헌책만은 놓지 않았던 그다. 아마 옛날 초량 서당 터에서 자란 덕에, 서당집 할매의 손자로 불리다 익은 자연스러움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내가 각별히 당부했던 일에 대해서 그는 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동안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가끔 작품을 썼을 수도 있다. 혹 뜻이 있다면 그것을 묶어 내게 보내 달라 한 것이다. 출판을 도울 수 있겠다 싶었던 까닭이다. 어쩌면 그 일이 그가 한때 부산 지역의 시조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손에 꼽힐 만한 사람임에 틀림없을 내가 그와 얽힌 연을 나름대로 푸는 바람직한 길이라 여겼던 바다. 문학사회에서 모습을 감춘 마흔 해, 시를 쓰지 못할 이유만 무성했을 길을 흘러 왔다 하더라도 마흔 해는 참으로 길고 길다. 어쩌면 아들조차 아버지가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세월을 살았을 그다. 시인으로서 창작에 대한 허기가 그에게 정녕 없었던 것일까. 희미한 친교의 끈을 놓지 않고 그가 먼 내게 전화를 준 일은 아직까지 문학을 향한 뜨거움이 남았다는 증표가 아닌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사람살이다. 뜻대로 이룰 수 있을 일 또한 많지 않다.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는 참은 하나. 삶은 쌓는 일이며, 그것도 꾸준히 쌓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이르고 못 이르고는 다음 문제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니 최선으로는 모자란다. 아예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예상과 기대를 벗어나야 작은 목표라도 제대로 이를 수 있다. 사실 우리 둘레에는 숱한 시간 도둑이 산다. 선량한 사람을 마냥 기다리게 하고, 양식에 따라 살고자 하는 예사 사람을 애태우게 한다. 남들에게 고통의 시간을 겪게 하고 그것을 훔쳐 자신의 권력과 돈, 이름을 늘이고 불리는 이들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분명한 도둑은 바로 자기 자신 아닌가. 자신의 시간을 허비하며 사는 본인이다. 자기 바깥으로만 떠밀려 도는 삶.

  그러고 보니 그는 둘레 곳곳에 있다. 우리 아버지며 할아버지다.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우리의 자화상인 그다. 시인이고자 했던 젊은 시절의 끈을 놓지 않았더라면, 한 해 한 편씩만 썼더라도 시집 분량은 마련할 수 있었을 세월을 그는 떠내려 왔다. 그에게 남은 삶은 앞으로 몇 해에 그칠지 모른다. 가라앉는 파도에 파도가 겹치는 짧은 시간이다. 그럼에도 열중하는 이에게는 놀라운 변화를 불러올 수도 있을 기회다. 어차피 참된 혁명은 내 안쪽의 일. 내 버릇과 내 생각머리를 넘어서는 일이다. 새해에는 그의 시 묶음을 볼 수 있을까. 작품을 위해 날밤을 새웠을 그 옛날 열정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그가 되살 수 있을까. 그나 나나 허망한 시간의 독배를 깨뜨리기 위해 새해에는 얼마나 독해질 수 있을 것인가.

<위 글은 국제신문 2015년 1월 8일(목)자 31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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