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특별기고] 송민순 석좌교수
[한겨레 특별기고] 송민순 석좌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4.12.26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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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로 가는 다리 놓은 오바마…북한으로 가는 다리 누가 놓을까

 
  “과거로 돌아가는 다리는 필요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미래로 가는 다리입니다. 우리 모두가 21세기로 가는 다리를 건설하는 데 동참합시다.” 1996년 8월 미국 시카고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이 재선 후보지명 수락연설에서 내놓은 모토이다.

  이를 두고, 불과 90마일 떨어진 쿠바까지의 다리도 못 놓으면서 무슨 미래까지 가는 다리냐는 비판들이 나왔다. 클린턴 1기 행정부도 대쿠바 봉쇄정책을 계속했으나 인권과 개방에 아무런 진전이 없는 데 대한 불만이었다. 북-미 제네바 합의 등 진보적 대외정책을 추진했던 클린턴도 국내 정치와 직결된 대쿠바 정책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이 집권 마지막 2년의 대표 프로젝트로 쿠바와의 관계 정상화를 내걸고 시공에 들어갔다.

  1959년 미국 기업의 몰수 이후 피그스만 침공 실패, 쿠바 미사일 사태, 라틴아메리카 반미주의의 기수 등 헤아릴 수 없는 사안들로 쿠바는 미국의 목에 걸린 가시와 같았다. 외교관계 회복에는 우여곡절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특히 상대방의 굴복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 미국 의회의 현 공화당 지도부가 순순히 놔둘지는 지켜볼 일이다.

  미국과 쿠바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의 기대는 당연히 한반도 문제의 한 축인 북-미 관계로 쏠린다. 쿠바와 북한은 장기 독재정권과 세습, 제재와 고립의 고통, 반미전선 연대 등 많은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있어 넘어야 할 난관의 차이는 현격하다.

  첫째, 쿠바는 한때 미국의 침공을 우려하여 소련의 핵미사일을 유치하기도 했지만 이미 반세기 전의 일이다. 반면 북한은 체제 유지를 위해 핵이라는 욕망의 화살에 꽂혀 있다. 그 화살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뽑아내도록 하는 데는 끈질긴 협상과 긴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 외교정책은 그런 집중과 인내에 익숙하지 않다.

  둘째, 지금 미국이 쿠바와 합의하고 있는 관계 정상화나 이란과 진행 중인 핵 협상을 북한과는 이미 두 차례나 타결한 적이 있다. 1994년 제네바 합의와 2005년 6자회담의 9·19 공동성명이다. 그러나 이행에 실패했다. 그래서 덧난 상처처럼 치유하기가 어렵다. 지금 북-미 간에 벌어지고 있는 희대의 사이버 전쟁은 그 단면의 하나이다.

  셋째, 쿠바는 대미관계 정상화로 개방을 하더라도 당장 정권 자체에 치명적 위험을 느끼지는 않는다. 반면 한반도에는 상충되는 가치 체제가 대립중이다. 그 한쪽을 주체사상, 선군정치, 핵·경제 병진정책으로 장악하고 있는 북한은 미국과의 수교와 개방이 가져올 정권 파괴적 위험을 두려워해왔다. 미국이 과거 수교하자고 나왔을 때 북한이 오히려 뒷걸음질 친 역사가 말해준다.

  그런데 이 모든 차이보다 더 핵심적인 것이 있다. 미국의 대쿠바 정책은 미국 혼자 정할 수 있지만 대북정책은 동맹 한국과 함께 결정해야 한다. 문제는 한국의 의지와 능력이다. 5년 정권마다 대북 정책이 바뀌고 때로는 정책의 형체 자체가 보이지도 않는다. 게다가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북한 정권에 대한 변별력조차 잃은 사람들과 권력 유지를 위해 과거로의 다리에 몰입하는 사람들로 나라가 어지럽다. 이래서는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한반도 미래로 가는 다리의 결정적 장애는 북한 핵이다. 현실적 가능성이 희박한 북한 붕괴나 무력 사용이 아닌 한, 북핵 문제의 어떤 해결에도 북-미 관계 개선이 불가결의 요소이다. 그러나 미국은 지금처럼 북한의 핵이나 사이버 위협 하에서는 결코 협상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도 체제와 정권에 대한 위협을 느끼는 한 거친 행동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면 결국 한반도는 냉전의 잔존지역으로 남게 된다.

  오바마 대통령이 쿠바로 가는 다리를 놓을 수는 있어도 한반도의 미래로 가는 다리를 놓을 수는 없다. 오직 한국이 놓는 것을 도와줄 수 있을 뿐이다. 90년대 한국이 쿠바와 관계 개선을 모색하던 즈음 미국은 자국의 대쿠바 정책을 한국이 존중해줄 것을 요청해 왔다. 한국의 대북정책을 미국이 존중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다.

  북한에 핵 포기와 생존 맞춤형 개방의 길을 설득력 있게 보여 주고, 미국의 손을 끌어 거래를 성사시킬 나라는 한국뿐이다. 지금의 동북아 정세는 분단 70년을 얼마든지 더 늘려갈 태세다. 남북관계만 바라보고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안이한 생각에 젖어 있어도 될까. 한반도 미래로의 다리에 대한 주인의식과 소유권 행사가 더욱 절실해진다.

<위 글은 한겨레 2014년 12월 25일(목)자 08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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