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시론] 김근식 교수
[중앙일보 시론] 김근식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4.12.04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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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 골든타임 살려야 골든타임 온다

 
  위기 극복의 적기라는 의미에서 요즘 ‘골든타임’이 유행이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상황은 돌이키기 힘들게 된다.

  세월호 침몰에서도 골든타임 내에 기민한 구조가 가능했다면 안타까운 희생을 훨씬 줄일 수 있었다. 경제에서도 골든타임을 허송하면 더 이상 회복이 어렵게 된다. 꼭 필요한 것을 해내야 하는 주어진 시간이 바로 골든타임인 것이다. 그러나 인명 구조나 경제 회복에만 골든타임이 있는 게 아니다. 외교안보에도 골든타임이 존재한다. 적절한 시기와 기회를 놓치면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뒤처지게 된다. 연말 들어서면서 이제 남북관계도 골든타임을 지나가고 있다.

  남북관계의 골든타임은 지난 10월 초 황병서 일행의 깜짝 방문이 최적기였다. 서로 엇박자를 내던 남북이 극적으로 고위급 접촉에 합의했고 분위기도 고조되었다. 그러나 모처럼 찾아온 남북 대화의 골든타임이었지만 전단 살포를 둘러싼 기싸움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전단 살포가 남북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도 표현의 자유는 막을 수 없다는 남측의 어정쩡한 태도와, 전단 살포를 막기 전에는 대화가 있을 수 없다는 북측의 막무가내식 입장이 결국 남북관계의 골든타임을 허망하게 지나버리게 만들었다.

  지금 남북관계에서 또 한 번의 골든타임이 절박한 이유는 최근 동북아 정세의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어제의 적도 오늘의 친구도 없이 국가 이익에 따라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짝짓기가 진행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압박과 맞대응 대신 협력과 대화를 강조하고 있다. 미·중의 대리전 양상이었던 중국과 일본도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문제에도 불구하고 합의를 도출하고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미·중·일이 한반도와 동북아의 과도한 긴장관계가 득이 없다고 판단하고 대화를 복원함으로써 군사적 대결과 긴장 고조를 완화시키고 상황 관리에 들어간 셈이다. 그런데 한국만 애매한 입장으로 미·중·일 사이에 끼여 있는 모양새다.

  각자도생의 동북아 정세에 한국만 뒤처지는 최근의 형국은 남북관계의 골든타임을 놓친 데서 비롯된다. 동북아 정세가 갈등과 대결 모드에서 대화와 관리 모드로 전환되는 최근의 과정을 우리가 먼저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주도적으로 이끌어 냈어야 했다. 남북관계라는 지렛대를 확보하면 한반도 문제와 동북아 정세에서 우리의 개입력이 늘어나지만 남북관계를 망실하는 경우 우리의 외교력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으로 그해 말 조명록 방미와 올브라이트 방북이라는 북·미 관계의 급진전이 가능했고, 2005년 통일부 장관의 방북과 김정일 위원장과의 6·17 면담으로 북한을 6자회담으로 끌어내고 결국 9·19 공동성명을 도출해낼 수 있었음은 그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남북관계의 골든타임이 완전히 지나버린 건 아니다. 북한의 대내외 정세도 남북관계 개선과 남북 대화 진전을 마다할 리 없는 상황이다. 2015년 북·러 정상회담과 북·중 정상회담을 희망하는 처지에서 대결과 교착의 남북관계보다는 대화와 협력의 남북관계가 북한에는 훨씬 유리한 환경이 될 것이다. 박근혜 정부도 마찬가지다. 집권 3년차에도 남북관계의 정상화 계기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통일대박론’의 현실적 의미는 급감하게 될 것이다. 미·중 관계와 중·일 관계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지금의 현실을 감안할 때 박근혜 정부가 남북관계라는 지렛대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동북아와 한반도 정세에서 우리의 적극적 개입력과 발언권을 상실한 채 여전히 미·중·일 사이에 어중간하게 끼여 있는 어려운 형국이 될 것이다.

  지금 북은 전단 살포를 비난하면서도 여전히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정부는 고위급 접촉이 무산되었다고 공식화할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북에 고위급 접촉을 다시 제의해야 한다. 전단 살포와 군사훈련 문제도 고위급 접촉에서 논의 가능하다는 점을 북에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 김대중 정부 당시도 집권 초 베이징(北京) 비료회담이 결렬되고 2년차에 연평해전까지 벌어졌지만 신뢰의 끈을 유지하고 남북관계 개선의 일관된 의지를 고수함으로써 위기 극복의 골든타임을 살렸다. 결국 3년차에 정상회담 성사로 남북관계의 골든타임을 구가할 수 있었다.

  골든타임이 지나버리면 정말 남북관계는 돌이키기 힘든 상황이 될지 모른다. 이명박 정부 2년차인 2009년 하반기에 남북관계 개선과 정상회담 합의가 결국 무산되면서 다음해 2010년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까지 이어져 남북관계가 돌이키기 힘들게 악화되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원칙만을 내세워 유연함을 놓치면 그것은 고집이 되고 결국 원칙도, 실리도 챙기지 못하게 된다. 아직 골든타임은 남아 있다. 위기 탈출의 골든타임을 적시에 잘 살리면 2015년은 남북관계의 골든타임(황금기)이 될 수 있다. 적기를 살릴 수 있도록 빨리 서둘러야 한다.

<위 글은 중앙일보 2014년 12월 4일(목)자 33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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