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인문학 칼럼] 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인문학 칼럼] 박태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4.04.03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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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을빈을 바로 알자

  우리 근대 여명기와 성장기에서 서구 종교 선교문화의 영향은 컸다. 근대 의식과 문화, 양식을 깨닫고 배우는 주요 원천 가운데 하나였다. 제국주의 왜로(倭虜)의 식민문화·수탈문화와 달리 그것은 근대 이행의 도우미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런 점은 겨레 단위가 아니라 지역 단위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특히 부산·경남은 근대의 대표 관문이었다. 영연방인 미국과 영국, 호주의 선교 단체는 일찍부터 부산·경남지역 활동에 나섰다. 각별히 교육과 의료 선교에 무게를 두었다. 우리가 팽개쳤던 한센병 환우를 위한 노력은 눈부셨다.

  그들 초기 선교사 가운데 어을빈(C. H. Irvin)이라는 이가 있었다. 오늘날 부산 중구의 역사문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적고 있는 이다. 그는 1894년 부산에 왔던 미국 장로회 소속 선교사였다. 1903년부터는 동광동에 어을빈 병원을 세우고 의료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만병수라는 약을 개발해 이름을 드날렸다. 말 그대로 만병에 듣는다고 여겨진 물약이었다. 온 나라에서 우편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검은 탕약을 마시던 우리로서는 서양 사람의 투명 물약이 신비롭기까지 했던 셈이다. 경쟁 상품도 늘었다. 만병수를 본따 '만병약수'라 이름 붙이거나, 어을빈과 비슷한 이름인 '어을삼'이나 '어을비'로 적은 것도 있었다. 영국인이 비슷한 제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부산 지역사회에서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아내와 아들을 두고서 스물여섯 살이나 어린 한국 처녀 양유식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녀는 기독교 집안의 맏이였다. 어을빈 병원 간호사로 일하다 그와 정분이 났다. 보다 못한 아내는 1911년 무렵 왜나라로 떠나버렸다. 어을빈은 그 일로 교계에서 나와 양유식과 살림을 차렸다. 그녀 동생 양성봉은 만병수 판매 운영을 책임졌다. 양유식은 시쳇말로 부산의 첫 오렌지족이었던 셈이다. 1910, 1920년대 당대에 서구식 복장을 하고 서양인과 버젓이 애정 행각을 벌였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을 것인가.

  이러한 어을빈에 대해 이제껏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다. 어을빈은 1934년에 어을빈제약주식회사를 만들었고, 양성봉이 지배인으로 경영을 맡았다. 그러다 이듬해인 1935년에 그가 죽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어을빈은 1933년 2월 8일 오후 11시30분에 자택에서 영면했다. 1934년 이후 언론 광고에 사장 어을빈으로 거듭 나오는 이는 그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죽자 왜나라에 있던 아들이 돌아와 사업을 이어 받았다. 1934년 1월부터 물약 만병수를 정제로 만들어 주식회사 명의로 영업을 계속했다. 그런 사실을 몰랐으니 1935년까지 어을빈이 살아 있었다고 믿어 온 셈이다.

  당시 광고지에 따르면 물약을 정제로 바꾸면서 세 가지 원칙을 지켰다고 한다. 종래와 같은 원료에, 종래와 같은 제조 방법에, 종래의 물약과 같은 분량이 그것이다. 그에 따라 새 알약 만병수정은 일곱 가지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복용 간편, 약효 불변, 온수 용해, 송료 경감, 휴대 편리, 파상 무려, 영구 보관이 그것이다. 장황하지만 새로운 알약 만병수정이 기존 물약 만병수보다 훨씬 나아진 제품이라는 점을 꼼꼼하게 알렸다. 어을빈제약주식회사는 이 만병수정 말고도 보제약정, 어을빈 금계랍, 어을빈 고약, 어을빈 옴약도 팔았다.

  어을빈제약주식회사의 약광고는 1939년 12월까지 찾을 수 있다. 그때까지 영업을 계속하다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지배인 양성봉이 일을 그만 두고 반여동으로 내려갔다는 시기와 일치한다. 1937년 중국대륙침략전쟁에 이어 1941년 태평양침략전쟁을 준비하던 왜로 입장에서 적국 미국인의 성공한 사업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부산시에서는 어을빈에 관련한 일들을 가볍게 보지 않고 갈맷길 걷기 탐방지로 어을빈 약국터를 넣어 두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세간에는 양유식이 폐결핵으로 죽자, 그녀가 묻힌 좌천동 공동묘지에 나날이 꽃다발을 바치며 어을빈이 비통해 했다는 이야기로 즐겨 입을 모아왔다. 둘의 사랑을 핵심 흥미소로 잡은 셈이다.

  이 일은 대중적 재미만을 부추긴 본말전도라 아니할 수 없다. 경남·부산 지역 근대 선교문화의 실체를 추적하고 그것이 끼친 영향을 되짚는 일과는 동떨어졌다. 지역 차원에서 근대 선교문화가 식민 제국 안의 또 다른 문화 제국이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한국인을 위한 울타리였는지 깊이 따진 적이 없다. 당장 1920년대만 하더라도 이념 노선에 관계없이 성당과 교회, 교계 학교가 소년·청년의 민족 항쟁과 계몽 학습에 주요 진원지였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한국에서 마흔 해나 살다 묻힌 서양사람 어을빈에 대한 관심 또한 경남·부산 지역 초기 근대사라는 무거운 틀 위에서 살펴야 한다. 관련 단체, 연구자들이 분발할 일이다.

 

<위 글은 국제신문 2014년 4월 3일(목)자 31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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