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칼럼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3.12.19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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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기 부산 첫 종합지 '신조선'

다대포 살던 소월, 활기찬 거리 묘사
백천, 미군이 씹던 껌 먹는 아이 보고 탄식…당시 모습 또렷해


  을유광복을 맞은 부산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위쪽 지역에서, 더 먼 만주에서 쫓겨 내려와 돌아갈 길을 찾고 있었던 왜병과 왜인, 이른바 징용·징병을 피해 부산을 떠났던 이, 물 건너로 끌려갔다 돌아온 동포로 좁은 부산이 넘쳤다. 거기다 세상 변화를 틈타 나라잃은시대 대표 왜인의 도시였던 부산의 적산을 취해 한몫 보려는 모리배·잡상까지 끓었다. 이러한 동향을 알려 주는 사료는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중요한 것이 언론 출판물이다.

  광복을 맞자 신문이 앞장을 섰다. 1945년 9월 '민주중보'를 시작으로 일곱 개나 되는 신문이 부산 바닥을 채웠다. 잡지도 움직였다. 종합지·문예지·경제지·어린이지가 1946년 벽두부터 이어졌다. '주간 중성' '월간 중성' '경제' '문예 조선'이 그들이다. 신문과 다른 무거운 기사와 현안에 대한 발언을 담기 위한 길이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처음 나온 종합지는 무엇일까? 1946년 1월 5일에 창간호를 펴낸 '신조선'이 그것이다. 이제껏 이름만 알려져 온 잡지다. 찍은날은 1945년 12월 20일이었다.

  광복 다섯 달 만에 나온 종합지가 '신조선'이다. 월간을 겨냥했으나 몇 차례 나왔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펴낸곳은 동대신동 신조선사. 양성철이 편집·발행을 맡았다. 창간사를 우석(愚石)이 썼다. 양성철과 관계는 알기 어렵다. 언론 자유가 오자, 온 나라에 일흔에 가까운 당이 서고 잡지도 편당적이거나 영리를 앞세워 심하다고 창간사는 썼다. '신조선'은 그들과 달리 안개 속을 헤매는 삼천만 동포에게 광명을 밝히겠다는 취지를 밝혔다.

  '신조선' 창간호에는 여러 글이 실렸다. 영도 출신 수필가 김소운이 쓴 '단군의 유적을 차저'와 어린 시절 김유신을 다룬 '신라 명장의 여명'이라는 글이 눈길을 끈다. 광복 초기 김소운의 부산 체류를 알 수 있는 터무니다. 태평양침략전쟁 시기 부왜(附倭)문학에 나서기도 했던 그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단군 유적을 몇 개 소개하는 글로 앞 시기의 잘못에 대한 참회록을 삼으려 했던 것일까. 광복을 맞은 그의 복잡한 심사를 읽을 수 있는 글이다.

  '신조선'에는 이 밖에도 광복 직후 부산 시민의 나날살이를 알 수 있는 글이 실려 흥미를 더한다. 다대포 사는 소월(素月)이 거리 풍경을 그려 담은 것이 그 하나다. 광복 뒤 10월 초순까지 두 달 동안 그는 세 차례나 부산으로 나왔다. 8월 18일에는 인산인해를 이룬 부산역 풍경과 왜병 출몰을 목격했다. 만나는 왜인은 이전과 달리 활기 없이 걷는다 했다. 우리나라 사람은 아는 이 모르는 이 없이 반갑다 반갑습니다를 소리쳐 대조를 이룬 모습이다.

  다대포로 돌아온 그는 가족과 함께 대한독립만세, 미군만세를 불렀다. 저녁에는 종을 쳐 마을 사람을 모은 뒤 광복 소식을 전했다. 자신이 일하고 있었던 학교 교정이었을 것이다. 9월 28일 다시 부산 부두로 나온 소월은 그때까지 왜병이 내왕하는 것을 확인했다. 10월 6일에는 부산의 교육 전문가를 찾았다. 그는 국사를 가르치고 애국혼을 키우고, 왜풍을 버리도록 가르치라 했다. 심장에서 나온 모세혈관과 모세혈관의 피가 하나로 엮이듯 나라가 통합해야 한다는 가르침에는 기뻐했다.

  백천(白泉)이 쓴 글도 있다. 미군이 부산에 들어온 때는 1945년 9월 17일이었다. 열댓 살 남짓한 아이들이 공부는 않고 담배나 물건을 파는 장사꾼이 되었다. '할노' 한 마디만 배워 미군에게 담배를 얻어 그것을 되판다고 혀를 찼다. 미군이 씹다 버린 껌을 주워 먹는 아이도 생긴 모양이라 탄식했다. 아이를 둔 어버이가 반성하라 일갈했다. 나라 바깥에서 서른다섯 해 동안 악전고투했던 선배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일치단결할 것도 빼놓지 않았다.

  '신조선'은 광복기 부산의 정황을 재구성하는 데 요긴한 사료다. 부산은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 건성건성 잘못 알려진 것이 더 많다. 얇은 잡지 한 권이지만 뜻이 가볍지 않다. 지나간 출판물과 그들에 대한 꼼꼼한 갈무리가 왜 필요한 일인지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본보기다. 오늘날 그들을 공개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은 없다. 기록과 보존을 우습게 아는 곳에서 거짓과 왜곡, 무지와 폭력은 몸을 불리는 법이다.

             <위 글은 국제신문 2013년 12월 19일(목)자 31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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