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기고] 송민순 석좌교수
[한겨레 기고] 송민순 석좌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3.12.0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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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평양 질서 재편, 한국이 ‘4국협의’ 멍석깔라

   2008년 3월 미국 하원 군사위원회에서 당시 태평양군사령관 티머시 키팅 제독은 미국과 중국 사이 패권 다툼의 한 단면을 예고하는 증언을 한다. 중국군의 고위 인사가 그에게 “하와이를 기점으로 태평양을 동서로 나누어 미·중이 서로 관리하자”는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농담조로 나온 말이라고 했지만 의회 증언에서 밝힐 정도로 의미있게 받아들인 것이다.

   4년 뒤인 2012년 2월 시진핑 당시 중국 부주석은 <워싱턴 포스트>와의 서면 회견에서 “광대한 태평양은 중·미 양국을 수용할 만큼 충분한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있는 발언을 한다. 미국과 함께 태평양을 공동 관리하자는 희망을 시사한 것이다. 앞선 중국군 인사의 비공개 발언 취지가 외교적 표현으로 정제된 것으로 들렸다.

   이에 앞서 2001년 4월 중국 전투기가 남중국해의 하이난 해역을 비행하던 미군 정찰기를 강제 착륙시켰다. 한국 서해에서 동중국해와 대만해협을 거쳐 남중국해로 이어지는 서태평양 경계 선상에서 오랜 기간 진행돼온 미국의 정찰활동에 물리적 제동을 건 것이었다. 이 사건이 미국의 사실상 사과와 정찰기의 해체 반송으로 종결된 뒤 미·중은 군사적으로 서로를 가급적 자극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태평양의 현상을 관리하려 해왔다.

   중국은 하이난 사건 뒤에도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11월23일 동중국해에 이를 선포했다. 일단은 일본이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와 한반도 유사시를 상정하면서 미-일 동맹의 집단자위권 명분 아래 군사력 강화와 역할 확대를 가시화하는 데 대한 표적대응인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2차대전 후 서방 중심의 기존 세계 질서에 대해 수용, 유보, 거부의 세 범주로 나누어 대응해왔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이나 세계무역기구(WTO) 등 안보·경제 질서에 대해서는 중국의 핵과 경제능력이 일정 수준에 도달했을 때 수용했고, 민주·인권 등 정치·사회적 가치 질서에 대해서는 수용을 거부해왔다. 한편 한국과 일본 상공 등 서태평양의 방공식별구역과 같이 전후 미국이 만든 지역 질서에 대해서는 유보적 자세를 취해왔다.

   그러던 중국이 이번에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우리의 이어도를 포함한 해역에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한 것이다. 중국도 자체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타국의 기존 구역과 중첩될 때는 사전 협의와 합의를 거치는 것이 국제관계의 기본이다. 이번 조치의 배경이 무엇이든 간에 소위 중국 위협론을 다시 부각시키기에 충분한 행동이다.

   중국의 행동은 지난 70여년간 사실상 미국의 내해처럼 관리돼온 서태평양의 기존 질서에 대한 변경 요구로 해석된다. 미국은 일방주의와 다자주의를 오가면서 전후 세계 질서를 운영해왔다. 혼자 처리할 수 있으면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불가피하면 다자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미국의 이런 정책은 세계 질서 유지의 기둥 구실을 했지만 충돌도 야기했다. 이제 중국도 그 패턴으로 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각각 일방주의를 추구할 경우, 서태평양에서만도 도처에서 충돌이 불가피하다. 그 최전선에 한국이 있다.

   방공식별구역 제도는 국제법적으로 확립된 것이 아니다.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질서다. 동중국해의 방공식별구역 문제가 미-중이나 중-일 사이에 양자적으로 타협될 일은 아니다. 그렇게 되기도 어렵다. 이어도를 포함한 동중국해의 핵심 이해당사자인 한국이 기존의 한·중·일 채널에 미국을 포함한 4국 협의를 추진하기 바란다. 동중국해의 가장 큰 섬인 제주도에 모여서 현 상황의 악화를 방지하고 서태평양에서 협력의 질서를 만드는 장을 세우는 것이다.

   한국이 미-중 사이에 균형 역할을 하겠다는 것도, 미-일 동맹의 앞장에 서서 대중국 전선에 나서는 것도, 국가 이익과 지역 공동체의 안녕에 부합하지 않는다. 역내의 조화로운 질서를 만드는 촉진자 역할이 한국에게 맞는 길이고, 또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역할을 할 다른 나라는 없다.

<위 글은 한겨레 2013년 12월 3일(화)자 3면에서 발췌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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