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인문학 칼럼] 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인문학 칼럼] 박태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3.10.1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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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덕술이도 문인이었다네

민족을 짓밟고도 문인 추앙받는 파렴치 부왜배들 두고만 볼것인가

   덕술(德述)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다. 성을 노(盧)로 썼다. 1900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울산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한 뒤에 살길을 찾다가 1920년 경남순사강습소에 들어갔다. 을유광복까지 통영·울산·동래·서울·평양, 나라 곳곳에서 이른바 조선총독부와 왜왕의 충견으로 한 몸 바쳤다. 그 결과 한국인으로서는 두 손에 꼽힐 정도만 오를 수 있었다는 경시 자리까지 꿰찼다. 악질 부왜경찰의 대표가 그였다. 광복투사와 항왜 인사를 짓밟고 족치고 고문했다. 오로지 자기 명리를 위해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았던 부왜배였다.

   을유광복 뒤 덕술은 수도청 수사과장으로 낯빛을 바꾸었다. 중앙 경찰 수사통 간부로서 위세를 떨쳤다. 그러다 1949년 반민특위에 잡혔다. 특위가 흐지부지되는 바람에 풀려났다. 전쟁을 틈타 군 헌병대 장교로 변신했다. 부산제2범죄수사대장으로 지내다 1954년 서울 육군헌병사령부로 옮겨 갔다. 부산에서 저질렀던 미군수물자 횡령이 들통 나 1955년 중령으로 파면을 당했다. 그 뒤 정치판을 기웃거렸다. 1960년 울산 민의원 선거에 나섰다 떨어졌다. 서울에서 흥신소를 차렸으나 비리로 붙잡히기도 했다. 1968년에 죽었다.

   그런데 평생 나라를 배신하고 겨레를 괴롭혔던 악한 덕술이도 문학을 했다. 제법 격을 지닌 양 묵림(默林)이니 무호(無號)라 호까지 썼다. 대표적인 것이 1954년 부산시 기관지 '부산시론' 창간호에 실었던 시조 '술회'다. '부산시론'은 전쟁기에 주간으로 냈던 '부산시보'를 월간으로 바꾸어 낸 매체다. 한시·시조·소설까지 실은 종합 교양지였다. 편집 고문은 박상희가 맡았다. 나라잃은시대 관료로 입신했던 자다. 덕술이 반민특위에 잡혔던 일을 두고 "타인의 중상모략"이라 화를 냈으니 사람됨을 알 만하다.

   "울산(蔚山)을 생각하매 이 마음이 울울(鬱鬱)하니/천마산(天馬山) 떠나가며 앙천(仰天) 탄식(歎息) 길게 한다/장부(丈夫)도 비무루(非無淚)라고 말한 이는 누구뇨//강동(江東)에 팔천(八千) 제자(弟子) 기다리고 있건만은/오강(烏江)에 흐르는 물 영웅한(英雄恨)을 자아내니/跂으다 권토중래(捲土重來)를 타일(他日) 어이 바라리//대지(大志)를 품에 품고 통(通)할 길을 찻었것만/통(通)할 수 있는 일도 덮어놓고 못 통(通)하니/암루(暗淚)를 천만행(千萬行)이나 뿌려놓고 가노라."

   '술회'의 부분이다. 어떤가? 덕술의 악행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큰 포부를 지녔던 지사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서는 심회로 읽힐 법하다. 부산을 떠나면서 남긴 글이다. 스스로 '권토중래'를 꿈꾸는 '장부'라 했고, '영웅'과 동일시했다. 그래서 '영웅한'이 남는다고 지껄였다. 참으로 철면피한 글이 아닐 수 없다. 전후에는 한 발 더 나가 "나라가 위태하니 이 가슴이 더욱 타고/백성이 괴로우니 이 속살이 좀 더 탄다"고 떠벌리기까지 한 덕술이다. 누가 백성을 괴롭혔으며, 누가 겨레의 가슴을 태웠더란 말인가.

   '술회'는 두 가지 사실을 일깨워 준다. 덕술 같은 부왜배가 공무원 기관지에 문인으로 자랑스럽게 나돌아도 아무렇지 않았던 당대 지역 풍토다. 다른 하나는 겉으로 알려진 문인과 문학도 실체를 따지면 얼마나 허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예순 해 앞서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덕술이 같은 자가 문인으로 나돌았던 그때와 오늘은 얼마나 달라진 것일까. 대단한 문인이라며 문학관을 짓고 공적으로 기리고 있는 이 가운데서도 정도와 경우는 다르지만 덕술이와 함께 놓고 볼 사람이 한둘 아닌 까닭이다.

   광복투사를 향한 선무공작에서 재능을 빛냈던 이, 입에 담지 못할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고 고향에서 쫓겨나듯 달아난 이도 있다. 이른바 조선총독부의 문학 출판물 검열관, 문화계 동향을 총독부에 일러바치며 살았던 끄나풀도 보인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문학적 명성의 밑자리 가운데 한 곳이 거기다. 대중이야 학교나 사회 인정 제도를 통해 배우고 굳힌 통념에 따르는 게 허물은 아니다. 실체적 진실에 관심이 없다고 어찌 탓하랴. 그러나 책임 있는 전문가 집단마저 다르지 않다. 슬픈 일이다.

<위 글은 국제신문 2013년 10월 17일(목)자 31면에서 발췌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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