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 교수, 경남신문 시론
정일근 교수, 경남신문 시론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3.06.24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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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속도, 사람의 지혜

시간의 속도, 사람의 지혜- 정일근(경남대 청년아카데미 원장)

  지난 주말과 휴일을 고성 대가면 천황산 자락에 단단하게 앉은 안국사에서 우리 대학 학생들과 함께 보내고 왔습니다. 저에게 시를 배우는 학생들과 한 학기를 마치면 ‘책씻이’를 하듯 산사 안국사에서 1박2일의 ‘종강입산’을 해오고 있습니다. 종강입산의 이름을 여름에는 반딧불이를 찾아가는 ‘반딧불이 입산’이라 하고, 겨울에는 고성으로 날아오는 철새 독수리를 만나는 ‘독수리 입산’이라 이름하고 있습니다.

  첫해에는 두어 시간 묵언하며 앉아 있는 일에 온몸이 뒤틀리던 학생들이 한 해가 지나자 그 앉음새가 단단해지고 된장국과 푸성귀뿐인 산사 공양도 밥알 한 톨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으며 저희가 먹은 그릇과 수저는 깨끗하게 씻어 단정하게 놓아 두어 보는 눈이 흐뭇했습니다. 무엇보다 방에 들어갈 땐 자신들의 신발을 가지런히 놓아두는 습관은 그들이 지금까지 쓴 어떤 문장보다 빛납니다. 언젠가 저들이 자신이 벗어 놓는 신발처럼 단정한 시를 쓸 것이라 믿습니다.

  입산의 하이라이트는 반딧불이를 만나고 토론하고 시를 쓰는 일입니다. 고성 천황산에는 반딧불이의 서식지가 숨어 있습니다. 이름만 듣던 반딧불이를 직접 만나고 밤하늘을 뒤덮는 반딧불을 보며 건강한 생태와 생명의 아름다움엔 저절로 환호성이 터집니다. 반딧불이가 이슬만 먹으며 반딧불을 밝히는 이유가 ‘짝짓기’를 위한 활동이지만 그 기간이 불과 10일 남짓하다는 사실에 학생들의 반응은 제각각입니다.

  학생들은 토론을 통해 반딧불이의 사랑은 짧은 시간이라 ‘슬픈 사랑’이라고 직유하기도 하고, 사랑할 시간이 짧으니 ‘가장 뜨거운 사랑’이라고도 은유합니다. 그 직유와 은유로 학생들은 시를 씁니다. 자정을 넘겨 시작되는 심야 백일장에서 좋은 작품에는 안국사 주지인 대안 스님이 직접 구운 도자기나 된장이나 참기름을 부상으로 주고 있어 그 또한 받아서 기쁜 상입니다.

  산사를 찾는 일은 자신을 찾는 일이라고 합니다. 한 학기를 바쁘게 달려온 학생들에게 템플스테이의 일환인 종강입산은 시간의 거울에 자신을 얼굴을 비춰보는 일이라 믿습니다. 졸업을 앞둔 제자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해지고 이번 학기를 마치고 군 입대를 하는 제자는 입대하기 전에 꼭 읽고 싶은 시집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3학년이 되어 첫사랑에 빠진 제자는 57일된 그 사랑에 대해 가슴이 뜁니다.

  저에게 산사에서 1박은 강의실이나 연구실에서 하지 못하는 ‘긴 대화’가 있어 좋습니다. 화려하고 요란한 시간은 덧없어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말지만 산사의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갑니다. 그 시간 위에 긴 의자를 놓고 제자들과 나누는 이야기는 자연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1박2일이 참 긴 시간이라고 새삼 깨닫는 것은 그건 시간이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바쁜 시간은 바쁘게 흘러가고 따듯한 시간은 따듯하게 흘러간다고 믿습니다. 지금, 당신의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어느새 계사년 한 해의 반이 달력에서 사라졌습니다. 바쁜 사람에게 시간은 더욱 바쁘게 흘러가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사람에겐 시간 또한 느릿느릿 가는 법입니다. 시간은 쓰는 사람의 쓰임새 따라 간다는 말입니다.

  얼마 전 존경하는 분에게 좋은 일이 있어 젊은 시절 중국 쓰촨성을 여행하다 어느 골동시장에서 구입했던 오래된 ‘자사호’를 선물하며 절수(切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자사호가 제 몸에 담긴 차를 권할 때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칼 자르듯 물을 자르는 절수의 힘이 좋아 남은 시간을 아껴 오랫동안 후학을 지도해 달라는 뜻을 담아 선물했습니다.

  반쯤 남은 올해를 자사호에 담아 쓸데없이 써버리는 시간은 칼 자르듯 자르고 싶습니다. 점점 무더워지는 계절입니다. 덥다고 날로 버리는 시간이 얼마나 많을지 걱정입니다. 시간은 멈출 수 없는 속도이지만 그 속도를 잘라 쓰는 사람의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정일근(경남대 청년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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