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인문학칼럼] 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인문학칼럼] 박태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3.06.2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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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동이 20세기 부산을 빛낸 사람이라고?

일제 수탈 앞장서고 왜나라 단가 짓던 고두동 현양하다니
최소의 양식 있다면 부산시 재조사해야

   부산시는 2004년과 2005년 두 해에 걸쳐 '20세기 부산을 빛낸 인물' 예순두 사람을 선정, 발표했다. 부산 출신이거나 부산을 중심으로 일하면서 지역과 나라에 공적이 뚜렷한 사람을 본받도록 올려 세운 것이다. 전문가가 '부산을빛낸인물선정위원회'에서 일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이즈음 명단을 볼 기회가 닿아 살피니 논란이 클 사람이 여럿 보인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문학 쪽에서는 일곱 사람이 올랐다. 부산 문학 백 년에 공공 현양의 대상이 될 만한 문인이 그들이란 뜻이다.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시조 시인 고두동(1903~1994)도 그런 한 사람이다. 고향 통영에서 1920년대 중반부터 동인 활동을 벌였다. 만년에는 고대사와 지역사에 관한 글을 내놓곤 했다. 오래 시조 시단을 지킨 공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겉보기 사실 말고 모름지기 그의 삶과 문학이 20세기 부산을 대표할 만한 높이에 이른 것인가? 약력에서 그는 1920년대 후반부터 맡았던, 경북·경남의 전매청 전매서장 직을 자랑스럽게 늘어 놓았다. 나라잃은시대 전매청이란 어떤 곳인가. 이른바 조선총독부 소속 관청이 아니었던가.

   왜로(倭虜)는 우리나라를 강탈한 뒤 바로 전매제도를 실시했다. 담배와 소금, 인삼(홍삼)과 약용 아편의 경작·조사·제조·판매·수입·수출의 모든 과정을 독점적으로 관리하고 유통과 판매를 굳힌 것이다. 이른바 조선총독부 전매국이 그 일을 전담했다. 사사로운 거래를 금지하고 생산품을 총독부에만 판매해야 했고, 살 때 또한 저들이 부르는 값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35년에 걸친 피식민지 시대 우리에 대한 안정적인 재정 수탈을 꾀하고 민족 산업의 성장을 가로막았던 핵심 장치가 전매제도였다.

   조선총독부는 경기·전주·대구·평양에 지역 전매국을 두었다. 대구전매국은 경남북과 충북, 전남 일부를 아우르는 곳의 업무를 보았다. 고두동은 이곳 여러 판매소의 소장 직을 거쳤다. 양산·의성·김해·청송이 그곳이다. 1929년부터 1945년 광복에 걸치는 기간이었다. 1940년에는 고도청(高島淸)이라는 왜로 이름으로 의성에서 김해로 '영전'했다. '전매보국 사업'에 세운 공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는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꾸준히 이름을 올린 중간 관리였다. 뜻있는 이들이 '관견(官犬)'이라 불렀던 계층이다.

   광복 뒤 그는 부산판매소 소장에 올랐다. 그러다 이름이 나라 안에 알려진 때가 1947년 2월이었다. '속출하는 탐관오리'라는 제목의 기사 탓이었다. 미군용 내의와 쌀을 감추었다 다른 한 관리와 함께 붙잡힌 사건이었다. 이듬해 5월 직을 사임했다.

   그 뒤 고두동은 문학사회에 더욱 몸담아 전력을 벗었다. 그런데 문인으로서 행적은 본받을 만한 것인가. 우리 근대 시조에 끼어든 왜풍(倭風)은 이은상의 양장시조만 아니다. 왜나라 전통 시가인 단가를 지었던 고두동의 시조도 거기서 자유롭지 않다.

   1942년 '황국신민(皇國臣民)된' 문필가는 "혁혁한 일본의 지도적 지반" 위에서 "현란한 문화를 건설"해야 한다고 각오를 다졌던 유치환도 존경받는 현실이다. 백제 서울 부여에 저들이 '부여신궁(扶餘神宮)'을 세울 때 거기 가서 "고마우신 신궁" 일에 "이천오백만 민중이 누구나" "힘을 합해 보겠다는 열성을 안 가질 이 없을 것"이라 감읍하고, "어서 자라" "굳센 일본 병정이" 되라고 우리 아이들을 부추겼던 이원수조차 해마다 기리는 세상이다. 고두동 경우가 무슨 문제냐 강변한다면 도리가 없다.

   역사에는 묻을 일도 있고 밝힐 일도 있다. 시조 시단에서 고두동을 선배 시인으로 존경한다는 데야 어쩌겠는가. 그러나 부산이라는 이름을 내건 현양은 차원부터 다른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뽑힌 이뿐 아니라, 묻힌 이들에 대한 엄정한 조사·연구·홍보를 거듭해야 한다. 그 과정에 인물 진퇴가 새로우리라.

   그런 일 처리야말로 20세기 근대의 긴 골짜기에서 나라 어느 지역보다 깊은 영욕을 겪었던 부산을 얼빠진 곳, 부산 사람을 얼빠진 '놈'들로 떨어뜨리는 망발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최소의 양식이다.

<위 글은 국제신문 2013년 6월 20일(목)자 30면에서 발췌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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