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신문 경남시론] 정일근 교수
[경남신문 경남시론] 정일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3.05.13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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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지귀’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윤창중 성추행 파문’ 화귀가 되어 세계 떠돌고 있으니…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을 두고 서슴지 않고 ‘패가망신’했다고 하는 정치평론가들이 많다. 국민을 충격으로 몰고 간 2008년 국보 1호인 숭례문 화재사건도 5시간여 만에 불길을 잡았는데 윤 전 대변인은 사건이 공개되는 순간 언론과 국민의 질타로 순식간에 다 타버리는 꼴이었다. 아마도 한국 정치사에서 이처럼 빠른 시간에 몰락한 정치인은 전무후무할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성추행 혐의 때문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은커녕 기자회견을 자처해 성추행을 전면부인하고 홍보수석이 귀국을 종용했다고 주장해 재만 남은 화재현장에 다시 한 번 기름을 끼얹었다. 이제 불똥이 청와대로 번졌다. 이번 ‘성추행 화재’의 불길을 잡는데 아마 오래 걸릴 것 같다. 국민들은 싫든 좋든 ‘불구경’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다.

   그가 현지시각으로 8일 낮 1시 30분쯤 워싱턴 댈러스공항에서 대한항공편으로 출발, 한국시각으로 9일 오후 4시 55분쯤 인천공항에 도착하기까지 국격 추락이라는 비난까지 받는 이 사건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을까?

   댈러스공항 발권 창구에서 400여만 원에 달하는 비즈니스석을 자신의 신용카드로 끊어 이용한 것이나 호텔에 모든 짐을 두고 온 것은 ‘아내가 사경을 헤맨다’는 귀국 변명에 맞는 황급한 모습을 연출하려 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그 편안하고 푹신한 비즈니스석에서 태평양을 건너오며 윤 전 대변인은 무슨 구명용 동아줄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윤 전 대변인은 나름대로 희망적인 진화 시나리오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을 통해 뉴스가 전해지는 순간,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타올랐다. 그를 지지하는 편에서 보면 ‘마녀사냥’이라고 해도 부족할 정도였을 정도였다. 종편은 특집방송까지 편성해 ‘패가망신’을 선언했다.

   윤 전 대변인은 ‘적’이 많은 정치가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인사 결과가 낳은 예고된 인재로 몰아붙이는 야당이나, 비난성 침묵으로 일관하는 여당이나, 융단폭격을 쏟아 붓는 언론이나, SNS 등을 통해 분노를 감추지 않는 국민이나 모두 윤 전 대변인의 적이었다.

   대통령직인수위 대변인을 맡았을 때도, 박근혜정부의 대변인으로 임명되었을 때도 그를 환영하고 지지하는 목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다. 이건 ‘안티’의 문제가 아니다. ‘대변인’이라는 자리가 언론과 소통하는 자리인데 언론이 먼저 공격하고 차갑게 외면했다. 그가 처음부터 그 자리를 사양하고 자유로운 논객으로 남았다면 어땠을까?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패가망신’을 지켜보면서 나는 문득 신라시대 설화인 ‘지귀(志鬼)’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귀는 신라 때 사람이었다. 지귀는 당시 여왕인 선덕여왕을 사모하다 몸이 여위어 갔다. 그 소문을 들은 여왕은 지귀를 불렀다.

   선덕여왕은 지귀에게 탑 아래에서 기다려달라고 하고 불공을 드리고 나오니 지친 지귀가 탑 아래 잠들어 있었다. 여왕은 지귀에게 자신이 다녀간 징표로 금팔찌를 두고 떠났다. 설화가 여기서 끝나면 ‘아름다운 스캔들’로 전해질 이야기의 끝은, 지귀가 여왕에 대한 사모의 정이 불타올라 화귀(火鬼)로 변해 온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고 한다.

   이 설화에서 지귀를 윤 전 대변인으로, 선덕여왕을 정치로, 금팔찌를 대변인 자리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단순한 스캔들로 끝날 수도 있었을 윤 전 대변인의 사건 또한 ‘화기’가 되어 한국과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떠돌고 있다. ‘동방예의지국’을 자처했던 한국은 이 화기로 해서 단번에 막을 내린 꼴이 되어버렸다.

   모름지기 ‘자리’를 탐하는 사람이라면 이번 일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언제나 욕심이 화근이며, 입신과 패가망신은 이웃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 글은 경남신문 2013년 5월 13일(월)자 23면에서 발췌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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