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정일근 교수 시집 '방!' 소개
[국제신문] 정일근 교수 시집 '방!' 소개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3.05.02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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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詩作) 30년 詩를 위한 헌시

 

 

정일근 시인 11번째 시집 '방!' 펴내

가난한 시를 평생 버리지 못하고 사는 친구가 있다.

가슴이 오래 아파 큰 병원에 입원했다. …

친구의 진단서에 기록된 병명은 고름가슴이었다.…

가슴에 고름 차는 병이 있다는 것 처음 알았다.

시가 시인의 가슴에 피고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고름가슴' 중에서)

 

   닉네임이 '고래의 시인'으로 알려진 정일근(경남대) 교수가 열한 번째 시집 '방!'을 세상의 하늘과 땅 사이에 띄우면서 "시력 30년이다"고 고백했다. 그 긴 세월 그는 무엇을 했나. 1984년 '실천문학'에 이어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시단에서 '서정시의 파수꾼'을 자임하며 시를 부여잡고 살았다.


   그동안 쌓인 '시의 공력'으로 가다듬고 가다듬은 81편의 절창을 담은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유독 '시(詩)'에게 띄우는 노래를 많이 부른다. 친한 친구처럼 가까이 있지만, 여전히 시는 멀기만 하고, 그만큼 사무친다는 고해성사일까. 여전히 시를 향해 가는 항해의 길은 고독하고 혹독하다는 뜻일까.


   '씨앗 하나가 나무를 키울 때/나무가 직립해서 숲을 이룰 때/나무 치고 숲 베어서 만든/피 뜨거운 이 종이 위에/너는 꽃 한 송이 피워보았는가/너는 씨앗 한 톨 품어 보았는가.'('씨앗이 시詩에게' 전문) 얼핏 타인에게 하는 푸념이나 질책 같지만, 오히려 스스로 휘두르는 채찍 소리이자 반성문으로 들린다. 이런 느낌은 다른 시에서도 자주 비친다. '나는 내 이름 뒤에 시인이라 쓰는 것이 부끄러워/(진짜 시가 찾아올 때 중에서)'나 '시가 시인의 가슴에 피고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고름가슴' 중에서)'. 여기서 그의 고백은 절정에 달한다. 그래서 '마을의 밥상마다 잘 익은 시가 올라/시에 밥 비벼 먹는 배부른 저녁이 있다('시, 간' 중에서)'는 그의 꿈을 엿들을 때면 시인의 사무침이 눈물겨우면서도 '그는 시인이다'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고래와 바다에 관한 시인의 경외와 사랑은 여전히 아름답고 재미있게 표현된다. 고래의 장례식에 가고, 고래가 '몇 분'이나 오셨는지 세려고 나가보고, 그물에 걸린 고래를 보면서 동해에 고래호텔을 지어주고 싶어하고, 수천 마리 돌고래 떼가 검은 등과 흰 뱃살을 드러내며 퐁당퐁당 뛰노는 동해를 '바다 피아노'라고 부른다.


   바다가 술이어도 다 마실 것 같은 세월이 있었고, 울산바다를 술상으로 펼쳐놓고 '바다 주점'이라 부르며 서른 무렵의 최영철, 고운기, 안도현 시인 등 벗들과 함께 단골로 술을 마시다가 희미한 마스카라 같은 수평선 한 뼘쯤 위에 새벽 안개가 걷힐 무렵 처용이 여주인을 데리고 서라벌로 떠나는 모습을 바라본다는 이야기는 차라리 시어(詩語)로 빚어낸 설화의 한 장면 같다. 그리고 지리산, 통영 동백꽃, 포항 구룡포,  자신이 사는 울산 솥발산(정족산) 아래 은현리 마을 사람들과 마을의 풀 꽃 별 때죽나무 늙은감나무 등 자연의 것들을 노래하면서 무욕의 삶과 삼라만상 모든 존재의 소중함을 노래한다.


   표제에 붙인 '방'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인은 "선문(禪門)에서 '방'이란 몽둥이란 뜻이다. 내게 방!이란 나를 때리는 시의 몽둥이다. 시가 나를 방!해서 나는 시를 받아 적었다"고 했다. 그는 또 "90년대 후반 이후 세 차례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시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스스로 감사하고, 동시에 몽둥이찜질 하는 심정으로 엮었다"고 덧붙였다.

<위 글은 국제신문 2013년 5월 2일(목)자 23면에서 발췌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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