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가 국회의장과 법무부장관에게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도록 권고함으로써, 한동안 잠잠했던 국가보안법의 존폐문제가 다시 핫이슈로 부각하고 있다. 물론 국가보안법에 대한 주장은 이념과 정책적 노선에 따라, 폐지에서부터 유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해답은 민주주의의 의미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국가보안법의 폐지가 민주주의의 원리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의 유지를 주장하는 부류들의 일반적인 기준은 '체제수호'이다. 그러나 이 기준은 민주주의의 원칙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체제수호의 측변에서 민주주의는 "억압이나 강제력이 아니라, 투표상자에 의해 체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가고 있다. 민주주의란 다양한 이념을 가진 집단들이 공정한 경쟁을 거쳐, 국민의 지지를 획득함으로서 유지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가 체제수호를 위해 '억압'이라는 강제력을 동원하면, 이미 그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가면을 쓰고 있는 독재가 되는 것이다.

1970년대 말 수아레즈(Adolfo Suarez) 총리가 이끈 스페인은 이와 같은 민주주의의 참 의미를 잘 실천하여 빠른 민주적 공고화를 이루어 내었다. 민주화가 한창이던 당시, 스페인이 직면한 큰 문제 중 하나는 공산당의 합법화 여부였다. 군부는 "공산당을 합법화하면 쿠데타를 일으키겠다."는 위협을 공공연하게 할 정도였으며, 보수주의자들뿐만 아니라 개혁주의자들도 "민주화를 위해서는 공산당의 합법화를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수아레즈는 ① 자신의 이념만 주장하고, 다른 이념을 가진 집단을 배척하는 행위는 민주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를 가장한 독재이며, ② 민주주의는 다양한 집단의 행위를 보고, 국민이 판단함으로써 지켜지는 것이고, ③ 법적인 소수에게도 존경심을 부여하여야 하며, ④ 민주주의는 반대파를 수용해야 하고 ⑤ 민주주의에 도전하는 세력이 있다면 '억압'이 아니라 문명화된 경쟁인 '투표'로서 해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이 같은 그의 정치철학은 국민의 지지를 얻어 공산당은 합법화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이는 스페인의 민주적 공고화에 많은 기여를 했다.

즉 수아레즈는 공산당을 합법화함으로써 이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정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분산을 막을 수 있었고, 공산당에 대한 억압비용을 줄일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사안에 따라 중도 공산주의자들의 협력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군부와 보수주의자들이 우려했던 공산화도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합법화 된 공산당이나 그 밖의 급진정당들이 선거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이들은 0.1-2%의 지지를 얻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데 그쳤던 것이다.

스페인의 경험이 증명해 주듯이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의 지지해야 하며, 반민주주의자들이 활동에 제한을 받아야 하는 그러한 제도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지지에 의해 제한되어야 하며, 국민들이 투표로 선택하는 제도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수호는 민주정당과 지도자들이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여, 국민들이 항상 민주정부를 구성하는데 동의함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상황은 당시 스페인보다 훨씬 좋다. 국제적 이념의 추세는 민주주의이며, 보안법의 존재이유인 북한과 적대관계도 완화되고 있고, 국민들의 의식수준도 상당히 향상되어 있는 상태이다. 국가보안법 문제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입각해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그와 관련된 심판은 여타의 법률과 국민의 선택에 맡겨도 된다는 말이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우리나라의 민주적 공고화에 많은 이점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국가보안법에 묶여 음성적으로 활동하는 집단들과 그들의 지지자를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며, 개혁적인 발전에는 이들의 지지도 얻을 수 있고, 국가보안법의 유지에 소요되는 비용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민주주의의 유지를 위해 정치인들은 국민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될 것이며, 국민들은 항상 민주정부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에는 여러 이념과 정책노선이 존재하는 다원주의적 환경이 조성될 것이며, 국민들은 이들 중 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함으로써, 민주주의가 한 단계 더 성숙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정당과 정치인의 노력과 민주주의의 장점에 대한 국민들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어떤 이념과 체제는 절대 안 된다는 금지조항에 의해 성취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위정자들은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