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경남대학교 60년사(7) 우리대학의 교명 변천사
다시 읽는 경남대학교 60년사(7) 우리대학의 교명 변천사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06.06.02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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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대학은 국민대학관, 국민대학, 해인대학, 마산대학, 경남대학의 시대를 거쳐 오늘의 경남대학교에 이르렀다. 이번호에서는 교명의 변천과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대학은 국민대학관으로 출발하였다. 대학관은 오늘날 고등교육 수준의 각종 학교에 해당하지만, 당시의 대학관은 인적 재정적 조건이 완비되면서 대학으로 승격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었다. 문교부는 1946년 12월 3일, '고등교육계획의 기본방침'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고등교육기관을 대학교, 대학, 대학관, 학관 등의 4가지로 분류하였다.

대학교는 3개 이상의 분과대학을 종합한 것이었고, 대학은 인문 혹은 자연과를 단위로 한 단과대학으로 규정하였다. 대학관은 주야를 불문하고 입학자격은 고등중학 졸업정도로서 수업년한 2개년 이상의 고등교육기관이나 정규대학으로 인정할 수 없는 대학 정도의 기관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학관은 주야를 불문하고 입학자격은 고등중학 졸업정도로서 수업연한이 1년 또는 1년 미만의 고등학술강습기관으로 규정하였다.

국민대학관은 재단을 확충하여 1948년 8월 10일에 국민대학으로 승격 인가되었다. 그리고 합천 해인사 경내로 이전한 후인 1952년 3월 23일자로 '재단법인 국민대학 기부행위 변경의 건'이 인가됨으로써 해인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경남대학교 50년사』에서는 "1952년 3월 25일에는 해인사 경내로 교사를 이전하고, 4월 23일자로 재단법인 국민대학을 재단법인 해인사로, 국민대학을 해인대학으로 개편 인가를 받아 해인대학으로 출범하게 되었다"고 하고 있으나, 교사 이전은 1951년에 이루어졌고, 개편 인가는 이듬해 3월 23일에 있었다.

마산으로 이전한 후인 1958년 8월 19일, 문고제 1,002호로서 법인 목적 변경 인가를 받아 사찰의 유지와 학교의 유지경영을 달리하는 재단으로 분리되었다. 이로써 우리대학은 해인사와 무관한 대학이 되었다. 그리하여 교명 변경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61년 2월 22일, 문고 제184호로 '마산대학'으로의 교명 변경을 인가 받았다.

당시 문교부의 내부결재 문서에는 "해인대학이라 하면 거개가 '해인사'와 연관하여 생각하거나 불교 교육만을 전문으로 하는 대학으로 착각하기 쉬우므로 이를 소재지의 명을 따서 '마산대학'으로 하련다는 취의로 보아 원의 적당한줄 사료 되옵기에 인가코자 한다"고 되어 있다.

당시 우리대학에서 논의되었던 교명 후보로는 '경남대학', '마산대학', '영남대학', '신라대학' 등이 제시되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각급 기관 등에 여론조사를 한 결과 마산대학이 지배적이었으므로 1960년 12월 23일자로 개최된 재단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교명을 마산대학으로 변경할 것을 채택 결의하였다. 물론 이전에도 언급했듯이 '마산대학' 외에 '경남대학', '영남대학', '신라대학' 등의 교명은 '해인대학은 중(僧) 냄새가 난다'느니 '해인대학은 해인사의 것'이니 하는 말들을 일소할 수 있으나, '해인대학은 진주의 것이니' 하는 말을 일소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1968년 2월 12일, 학교법인 삼양학원에서 학교법인 해인학원으로부터 마산대학 운영권 및 재산 일체를 인계받아 우리대학을 경영하게 되었다. 같은 날 첫 이사회에서 삼양학원은 우리대학을 경남대학으로 개편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동월 24일에 거행된 졸업식에서 이사장은 단기 5년, 장기 10년의 계획하에 실과초급대학의 병설, 부속 초 중 고등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연차계획으로 종합대학교에의 길을 터 놓겠다고 공언했다.

1970년 4월 9일에 재단 이사회에서는 경상남도의 유일한 일반대학인 우리대학을 명실공히 경남 유일의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킬 분위기 조성을 위해 법인명을 삼양학원에서 경남학원으로 변경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5월 20일에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교명변경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게 되었다. 결국 1971년 12월 31일, 우리대학은 경남대학으로 교명 변경 인가를 받았다. 이로써 마산대학이라는 한 지역의 대표에서 벗어나 경남의 대학에서 한국속의 대학으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한데, 1948년 개교 이래 줄곧 도립 농과대학이었다가 1968년에 국립 농과대학이 된 대학과 관련해 우리대학의 교명에 대해 왜곡이 있어 왔다. 그 왜곡은 오래도록 계속되었고, 광범위하게 진행되어 이제는 일일이 지적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1950년 당시 전국에 55개의 고등교육기관이 있었는데, 그 2/3가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국공립과 사립의 비율은 32대 68로 사립이 압도적이었다. 이 같은 지역 격차와 국공립과 사립의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한 도(一道)에 하나의 국공립대학이라는 방침이 만들어져, 1951년부터 1953년까지 경북 부산 전남 전북 제주 충남 충북대학이 신설되었다. 즉, 도명을 딴 국립 종합대학은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각 도를 대표하는 대학으로 명명되어진 것이 아니라 지역간의 격차와 국공립과 사립간의 불균형을 해소하고자 설립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경남지역에 설립된 국립 종합대학이 왜 경남대가 아니고 부산대인가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당시 경남종합대학교기성회 사무국측의 단과대학 '지방 산재안'과 부산대학의 종합대학 '부산 집결안'이 각각 별도로 문교부에 제출되었다. 이 때 문교부에서는 부산대학과 마산약대의 2개 단과대학을 가진 종합대학교안을 세웠으나, 부산대학 측의 반대로 번안하여, 부산대학의 문리 법 상학 등 3개 학부를 각각 단과대학으로 승격시고, 동시에 부산에는 공과대학과 의과대학을 마산에는 약학대학을 신규 개설하여 '경남대학교'를 편성한다는 안을 자문기관인 중앙교육위원회에 제출하였다.

하지만 동 위원회에서 "이미 인가된 경북 전남 전북의 각 종합대학교들도 불완전한데 또 다시 무슨 종합대학교냐"라며 부결시키자, 당시 문교부차관이 "경남대학교를 신설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설된 부산대학을 승격시킨다"는 설명을 통해 양해를 구하여, 재표결에 부쳐 가결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남지역의 국립 종합대학이 '경남'이 아니라 '부산'대학교로 결정된 것이다. 즉, 국립 경남대학교가 중앙교육위원회에서 국립 부산대학교로 바뀐 것이다.

한데 도립 진주농과대학은 1968년 3월 1일부로 국립 진주농과대학으로 변경되었다. 1967년 6월 22일, 경상남도 교육위원회에서 문교부에 제출한 '진주농과대학 설립자 변경 신청'과 이듬해인 1968년 1월 11일자 '문교부 국장회의 부의 안건'을 통해 볼 때, 그 이유는 부산시가 직할시로 승격(1963년)되면서 경남에는 국립대학이 없게 되어 지역사회의 교육균형의 불합리한 점이 적지 않았고, 더구나 부산시가 분리되면서 경상남도의 교육재정이 어려워져 도립대학 운영에 애로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운영의 원활을 기하려고 국립 농과대학으로 설립자가 변경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진주농과대학이 도립에서 국립으로 이관된 것을 가지고 사실을 호도해 온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경남 유일의 일반대학으로서 법인의 이름인 '경남학원'과 상통하게 '경남대학'으로 변경하여 종합대학을 향한 부단한 노력을 경주했던 우리대학의 역사를 왜곡해 왔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부산대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도에서 분리된 광주 대구 대전 광역시에 있는 전남 경북 충남대학교는 광주 대구 대전 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전남 경북 충남에 소재한 국립대학들이 전남 경북 충남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해야 할 것이다. 한데 이런 식의 황당한 주장은 그들 외에 어디서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김상민 연구위원(기록물관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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