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경남대학교 60년사(4) 우리대학의 마산이전 경위
다시 읽는 경남대학교 60년사(4) 우리대학의 마산이전 경위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06.06.02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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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우리대학이 마산으로 이전 정착한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건학초기 교사 문제로 미군정과 갈등을 겪은 바 있던 우리대학은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합천 해인사로, 해인사에서 진주의 가교사로 전전하다가 6년 만인 1956년에 안정적인 교사를 확보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지난 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대학은 1952년 빨치산의 해인사 습격을 계기로 진주시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그러던 중 1955년 8월 4일에 대학설치기준령(대통령령 제1063호)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 기준령은 교지, 교사, 운동장, 도서, 교원의 5개 항목에 걸쳐 대학설치 기준을 밝혀, 신설되는 대학과 학과는 처음부터 이 기준이 적용되고, 기존의 대학은 6년간의 유예기간을 두어 만일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에는 학교 폐쇄령을 내리도록 하였다.

당시 우리대학이 가교사로 사용하고 있던 진주시 강남동의 천전국민학교는 일제시대 일본인이 사용하던 정미소를 개조하여 강당 1개동을 설치하였을 뿐 기타의 교실 등은 매우 빈약한 상태였다. 또한 교사 내에 해인농림고등학교를 병설하고 있어 대학설치기준령에 부합될 수 없었다.

즉, 우리대학은 또다시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대학은 부산으로의 이전을 모색하였으나 진주시민들의 강한 반대와 문교부의 대학 분산방침에 의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학의 활로 개척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중 당시 대학설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마산시에서 적극적으로 우리대학의 이전을 제의하였다. 마산시에서 제공하는 교지와 교사는 대학설치기준령에 의한 심사기준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대학은 마산시 완월동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우리대학의 마산 이전은 마산시의 대학설립운동 결과였다. 마산에서는 1946년 11월에 약학대학설립기성회가 창립되었고, 1949년 1월에는 마산공과대학 설립기성회가 발족하였으나 그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또한 진해 해군사관학교의 마산 이전도 모색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하지만 마산지역 유지들의 계속된 노력의 결과, 1953년에 국립 부산대학이 부산대학교로 승격되면서 무학국민학교를 가교사로 한 부산대학교 마산약학대학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교사 신축이 더디게 진행되고 제반 지원 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1954년 9월, 약학대학 교수진과 학생들은 부산대학교로 이동(철수)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범시민적 차원에서 약학대학설립운동이 전개되게 되는데, 이 운동을 통해 확보된 교지, 교사를 통해 우리대학을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학설치기준령 외에도 당시 진주시는 우리대학이 발전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당시 진주시는 서부 경남의 농촌도시로서 인구가 불과 7만명 정도에 불과했는데도, 우리대학과 농과대학(현 경상대학교)이 병존하고 있었다. 또한 농촌 학생이 도시로 취학하는 현실과 일반 농촌경제의 어려움 등으로 인하여 학생의 등록실적은 부진하였다. 그리고 재적학생의 약 3할 가량이 미등록하였고, 재학생도 정원에 미달된 실정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진주시의 지리적 여건상 더욱 악화될 것이 분명하였고, 교수의 초빙 및 교류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반면, 마산시는 13만 여명 인구에 인접 군 및 진해시 등 부근 거주 인구는 약 60만명이었으며, 중서부 경남일대의 산업, 경제, 교통의 요충지였다. 또한 일찍이 약학대학유치기성회를 조직하여 대학설립운동을 벌여온 결과 동 대학용으로 시설된 교지, 교사 등을 우리대학의 유치를 위해 무조건 무상 양여 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마산시에서는 1956년 2월 26일, 약학대학에 제공할 목적으로 건축 중에 있던 시설 및 자재 전부를 재단법인 해인사에 무상 양여할 것과 이후 경제학부[商科] 증설을 적극 추진할 것을 약속하는 각서를 마산시장을 위시한 약학대학설치기성회 위원들의 명의로 우리대학에 제출하였다.

우리대학의 마산 유치 결정이 알려지자 진주시에서는 교육위원회와 시의회를 비롯하여 각계각층을 총망라한 '해인대학 이전반대 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범시민적으로 이전반대운동을 벌여 나갔다. 또한 경무대와 문교부 등 관계기관에 지속적으로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문교부에서는 1956년 2월 28일에 우리대학을 마산으로 이전시킨다는 방침을 확정하였으나 진주시민들의 반대가 너무 강하여 시행하지 못하였다.

결국 마산시에서는 문교부와 관계당국에 이전촉구 진정서를, 진주시에서는 이전반대 진정서를 제출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는 진주시를 중심으로 한 서부경남 지역과 마산시를 중심으로 한 중부경남지역간의 지역대결 구도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우리대학을 두고 두 시를 중심으로 지역간 대결이 벌어졌던 이유는 우리대학이 경상남도(부산을 제외한)의 유일한 인문계 대학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산시에서는 1956년 3월 23일에 해인대학유치 마산시민대회를 열어 "해인대학이 당지에 유치됨에 있어서는 약학대학 사용 목적으로 건축 중에 있는 건물 및 대지 일체를 동 대학재단에 무조건 제공하기로 한다"와 "대학설치기준령에 의거한 시설 완성을 위하여 계속 협조 노력하기로 한다"고 결의하고, 그 결의문을 문교부에 제출하였다.

마산시민의 열망과 문교부의 묵인 하에 1956년 4월 21일에는 거시적(擧市的)인 환영속에 완월동 신교사에서 개강식을 거행하였고, 6월 1일에는 교사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대학은 중부경남의 유일한 대학으로서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우리대학의 이전을 반대하는 운동이 계속 전개되어 문교부의 위치변경 인가를 받지는 못하였다.

동년 7월 15일에는 우리대학 학생들이 연서하여 문교부장관에게 "진주는 7만 인구에 불과한 농촌도시로서 기존 농과대학과 해인대학이 병존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며 마산은 14만 인구를 가진 중부 경남의 상공도시로서 대학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설치기준령에 해당되는 교사까지 마련되어 있다"며 마산으로의 이전을 인가해 줄 것을 탄원하기도 하였다. 진주시의 계속된 반대운동으로 지체되었던 우리대학의 위치변경 인가는 1956년 10월 17일에야 문고 제669호로 받게 되었다.

문교부장관이 대통령비서실에 회보한 1956년 11월 3일자 공문에 의하면 우리대학의 마산 이전은 합법적인 것으로 그 이유는 첫째, 진주에 있는 시설은 대학설치기준령에 부합되지 않으나 마산의 시설은 체육장은 부족하지만 교지, 교사는 동 기준령에 의한 심사기준에 합격됨으로 대학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마산으로 이전할 수밖에 없음. 둘째, 지역적으로 보아 진주는 농과대학이 있어 2개의 대학이 발전하기 곤란하나 마산은 지리적 조건이 진주보다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1개의 대학도 없으므로 마산으로 이전하는 것이 문교부의 대학 지방분산 방침에 부합됨. 셋째, 사립대학이 현상유지 또는 발전을 위해 이사회의 합법적인 결의를 통해 위치변경을 하고자 할 때에는 이를 인가함이 원칙이고, 본 건에서 그 비합법성을 발견할 수 없었음. 넷째, 해인대학을 마산으로 이전하여도 좋다는 방침이 전(前) 장관 시대에 내정되어 있었음 등이었다.

그럼에도 진주시에서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해인대학이 진주에 복귀하는 경우 배영국민학교 교사 교지 체육장 등 일체의 시설을 해인대학에 제공하고, 동 학교를 진주시 상봉서동에 이전 신축하겠다는 제의도 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몇 년 뒤 우리대학이 해인사와 결별한 후 교명을 변경할 때에 고려했던 '경남대학', '마산대학', '영남대학', '신라대학' 등의 이름에서 '마산대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다른 교명은 '해인대학은 중(僧) 냄새가 난다'느니 '해인대학은 해인사의 것'이니 하는 말들을 일소할 수 있었으나, '해인대학은 진주의 것이니' 하는 말을 일소할 수 있는 교명은 마산대학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상민 연구위원(기록물관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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