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경남대학교 60년사(3) 한국전쟁과 우리대학의 변모
다시 읽는 경남대학교 60년사(3) 한국전쟁과 우리대학의 변모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06.04.06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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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합천 해인사로, 해인사에서 진주로


한반도에 엄청난 시련을 안겨 준 한국전쟁은 이후 세계를 냉전체제로, 한반도를 분단체제로 고착화시켰다. 한국전쟁은 우리대학에도 시련을 안겨 줬는데, 우리대학의 역사에서 이 시기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합천 해인사(海印寺)로, 해인사에서 진주로 전전하며 가교사에서 수업을 하던 고난기였다. 한국전쟁은 이렇게 시련을 안겨 주었지만, 우리대학이 경남지역에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우리대학 역시 서울지역의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1950년 7월 1일, 부산 감천동에 임시 교사를 마련한 우리대학은 1951년 초 다른 대학들과 함께 전시연합대학에 편입되었다. 그러던 중 전황이 개선되던 가을 즈음에 합천 해인사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전시연합대학은 1951년 9월에 이화여대가 단독 개강하고, 10월 중순부터는 부산대가 이탈하면서 1952년 3월 25일에 완전 해체되는데, 우리대학도 1951년 가을 이들 대학이 이탈하는 시점에 해인사로 이전한 것으로 판단된다.

지난 1996년에 발간된 『경남대학교50년사』에서는 우리대학이 1952년 3월 25일에 합천 해인사로 이전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1951년 11월 29일에 우리대학의 이사장 및 학장 명의로 문교부에 보고한 '전시하(戰時下) 국민대학 교사 설치장소 및 학사일반 보고의 건'(발송문서는 본교 법인사무국에, 문교부 수신문서는 국가기록원에 보존되어 있다.)를 통해 볼 때 이 시기 이미 우리대학은 해인사로 이전하여 수업 중이었다.

우리대학이 해인사로 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우리대학을 경영하던 재단법인 국민대학이 합천 해인사와 사천 다솔사(多率寺)의 재산을 기반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며칠 앞둔 1948년 8월 10일 재단법인 국민대학의 설립이 인가되고, 아울러 우리대학도 문교부장 인가의 특종고등교육기관인 국민대학관에서 정규대학인 국민대학으로 승격, 인가되었다.

이 날의 정규대학 승격을 위해 동년 8월 7일, 조선불교중앙총무원장 김법린(金法麟)과 국민대학관장 신익희(申翼熙) 사이에, 해인사 및 다솔사의 토지를 기반으로 대학 승격 인가를 받은 후에 재단 명의를 재단법인 해인사로 변경하는 동시에, 그 재단의 목적을 해인사의 유지와 국민대학 경영을 목적으로 개편할 것을 약속하는 계약이 있었다. 또한 인가일인 8월 10일에 김법린과 신익희, 재단법인 국민대학관 이사장인 최범술(崔凡述, 다솔사 주지), 해인사 주지 임재수(林在修)의 계약 및 보증을 통해 문교부에 신청함으로써 우리대학은 정규 대학으로 승격, 인가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해인사에서의 우리대학 현황을 살펴보면, 명월당(明月堂)을 나누어 사무국과 제1 제2강당으로 사용하고, 사운당(四雲堂)을 나누어 제3 제4 제5강당으로 사용하였다. 제6강당은 구광루(九光樓)를 사용하였으며, 도서관은 화쟁각(和諍閣)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극락전(極樂殿)과 법왕당(法王堂)은 교수 기숙사로 사용하고, 궁현당(窮玄堂), 관음전(觀音殿), 홍제당(弘濟堂)을 학생 기숙사로 사용하였다. 실내 체육시설로 종래의 창고 두 동을 개수하여 유도장, 검도장 당수(唐手)도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실외 체육시설로는 야구 및 축구 겸용 운동장과 정구장, 농구 및 배구장으로 두었다. 그리고, 종래 경찰관주재소를 개수하여 학도호국단 도장으로 사용하였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해인사로 이전한 후인 1951년 11월 당시 우리대학의 학생수는 381명이었다. 학생수가 이렇게 적었던 것은 전쟁으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전장으로 끌려 간 것이 큰 이유이기도 하였다. 법문학부의 종교과, 문학과, 사학과는 1학년만 있었고, 법문학부의 법과와 정경학부의 정치과, 경제과에는 4학년까지 있었다. 1학년 뿐이었던 종교과에는 23명, 문학과에는 5명, 사학과에는 12명의 학생이 있었고, 법과에는 15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었다. 정경학부에는 정치과에 95명, 경제과에 96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었다. 이렇게 해인사에서 교육활동을 전개중이던 우리대학은 11월 30일자로 문교부에 '재단법인 국민대학 기부행위 변경'을 신청하여 이듬해인 1952년 3월 23일에 그 인가를 받게 되었다. 즉, 법인의 명칭을 재단법인 국민대학에서 재단법인 해인사로 변경하고, 운영하는 학교를 국민대학에서 해인대학으로 개칭하였다. 이로써 우리대학의 교명은 해인대학으로 변경되었다.

이때의 학부 및 학과 편제는 2개 학부, 3개 학과로 이루어졌다. 문학부는 종교학과와 국문학전공, 영문학전공, 사학전공으로 이루어진 문학부로 구성되었으며, 법정학부는 법률학과와 정치학전공과 경제학전공으로 이루어진 정경학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1952년 7월 13일 밤, 덕유산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빨치산 60여명이 해인사 일대를 내습하여 사찰 건물 3동이 불에 타고, 경찰관 등 3명이 피살되었다. 이날 우리대학생 7명과 중동중학교생 20여명이 그들에게 납치되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대학은 보다 안전한 장소로의 이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우리대학이 이전지를 모색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마산시와 진주시에서 각각 '대학도입기성회'를 조직하여 치열한 유치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우리대학의 이전지는 1952년 8월 18일 부산 묘심사(妙心寺)에서 열린 이사회에서 결정되었다. 10명의 이사 중 8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용조(李龍祚) 이사장의 사회로 개최된 이날 이사회에는 경쟁적으로 유치운동을 벌이던 마산시와 진주시의 대표들이 참관하여 그 경과를 지켜 봤다.

먼저, 김법린(1952년 10월 문교부장관 취임, 후일 본교 이사장) 이사는 진주로 이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그 이유로 첫째, 진주시는 경상남도청의 전소재지이며 서부경남의 중심지이기에 대학 소재지로 적당하고, 둘째, 마산시는 부산시와 인접할 뿐만 아니라 서부경남 출신 학생의 취학이 불편하며, 셋째, 해인사 등 기타 각 사찰과의 거리가 진주에 가까우며 교통 및 연락이 편하다는 점을 내세웠다.

반면, 최성관(崔性觀, 후일 본교 학장 및 이사장) 이사는 마산으로 이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첫째, 마산은 임시수도인 부산시와 거리가 가까워 교수 및 강사의 왕래와 관계 당국과의 연락상 편리하며, 둘째, 서울에서 피난온 우리대학의 입장에서는 교사피난 이전상으로 보아 폐허화한 진주 보다는 건물이 구존(俱存)한 마산시가 적당하고, 셋째, 일시적으로 피난한다고 하면 학생 취학 및 모집상으로도 유리하며 학교운영상 매우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각 임원들로부터 의견과 설명이 분분하여 결국 무기명 투표를 하기로 하였는데, 그 결과 진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대학은 동년 8월 20일 진주의 천전국민학교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우리대학의 진주 이전은 마산으로의 영구 이전을 위한 전조(前兆)에 불과했다. 다음 호에서는 그 과정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다.

김상민(기록물관리센터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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