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작품의 현장을 찾아서
고전작품의 현장을 찾아서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05.11.24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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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풍류, 늦가을 햇살…


마산역에 모여서 드디어 차가 출발했을 때의 그 느낌이란, 반복되는 일상을 깨고 떠난다는 생각에서였을까? 쑥스럽지만 '설렘'이라는 말 이외엔 달리 적절한 표현 방법이 없다. 우리는 11월 18일∼19일 이틀 간의 일정으로 고전작품의 현장 답사를 떠났다. 이번 답사는 호남지역의 고전 작품의 현장을 대상으로 하면서, 작품을 읽으면서 검토한 것을 실제 현장과 연결해서 이해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남해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면서 두 눈 가득 가을의 풍경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고산(孤山)과 다산(茶山)

水國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닫드러라 닫드러라/萬頃澄波의 슬카지 容與하쟈/지국총 지국총 어사와/人間을 돌아보니 머도록 더욱 좋다
<어부사시사 추사 2>

첫 번째 일정은 해남 녹우당. <어부사시사>의 현장인 보길도를 보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해남 녹우당에서 윤선도(1587∼1671)의 체취만 느끼고 나와야 했다. 윤선도 고택의 당호를 녹우당(綠雨堂)이라 한 것은 '산기슭의 비자나무에 한바탕 바람이 몰아치면 우수수 봄비 내리는 소리처럼 들린다'하여 붙여졌다고 하는데, 그래서 녹우당 뒤편의 비자나무숲을 꼭 가보아야 한다. 김소운은 <특허품>에서 "비자목 바둑판은 연하고 부드러운 탄력성이 특질이다. 한두 판만 두어도 돌자국으로 반면(盤面)이 얽어 버린다 그냥 두어 두면 하룻밤사이에 본디대로 다시 평평해진다. 돌을 놓을 때의 그 부드러운 감촉, '가야방'이 진중(珍重)되는 것은 이 까닭이다."라며 비자나무로 만든 바둑판을 최상으로 치고 있는데, 그 최상의 비자나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천연기념물이라 바둑판 생각은 접어야 했다.

다음 발길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유배지인 강진의 다산초당. 그는 <탐진촌요>에서, "새로 짜낸 무명이 눈결같이 고왔는데, 이방 줄 돈이라고 황두가 뺏어가네. 누전 세금 독촉이 성화같이 급하구나, 삼월 중순 세곡선이 서울로 떠난다고."라고 읊으면서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고발하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 초당이 있는 산기슭을 따라 오르는 데 20여 분쯤 걸리며, 약 100여 개의 돌계단을 오르고 나면 서암이 나타나고, 저만치 해배를 기념하면서 새겼다는 정석(丁石)이 보이며, 이어서 초당으로 추정되는 동암이 나타난다. 동암 너머 언덕쯤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다산은 흑산도에 귀양가 있던 형님 생각을 했으리라. 지금은 천일각이 덩그렇게 자리하고 있어서 나그네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백련사와 송광사

강진만을 뒤로 두고 다산초당 뒤의 사잇길을 따라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다가 보면 울창한 동백숲이 나타나면서 백련사에 닿는다. 동백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한두 그루에서 겨우 꽃망울을 볼 수 있었다. 백련사(白蓮寺)는 고려 후기에 요세(了世), 천책 등이 결사(結社)를 하여 천태종을 혁신하고자 했던 유명한 절이지만 지금은 퇴락한 모습이다. 정약용은 그 곳에서 천책의 시를 주목하여 <제천책국사시권>을 남기기도 했다.

이튿날 우리가 찾은 송광사와는 여러 면에서 견주어질 수 있다.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수선결사(修禪結社)를 하면서 선종을 중심으로 불교개혁을 하여, 뒷날 승보종찰로 우뚝 서게 된 송광사의 화려하면서 경건한 모습은 속인의 눈에도 수양정진의 차이를 말하고 있었다. 송광사에서 사시(巳時) 기도에 잠깐 참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번 답사의 성과 중의 하나이다.

정자와 가사

짝 맞은 늙은 솔은 조대에 세워 두고/그 아래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던져두니/홍료화 백빈주 어느 사이 지났관대/환벽당 용의 못이 뱃머리에 닿았구나 /청강 녹초변에 소 먹이는 아이들이/석양에 흥겨워 단적을 비켜 부니
<성산별곡>



답사의 이튿날 우리는 정철(1536∼1593)의 <성산별곡>이 탄생한 곳이며,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을 가진 식영정(息影亭)에서 정철이 <성산별곡>의 추사 부분에서 노래했던 풍류와 자연을 벗삼은 여유로운 삶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특히 이 정자는 일반 정자들과 달리 한쪽 귀퉁이에 방을 두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깐 것이 특이했다. 식영정을 내려오는 길, 오른쪽에 자리한 가사문학관에 들러 한국가사문학의 귀중한 유물을 관람했다.

이어서 들른 면앙정은 참나무로 둘러 쌓여 있었다. 면앙정은 자신의 호를 지어서 붙일 만큼 송순(1493∼1582)이 자주 오르던 곳으로, <면앙정가>에 나오듯 그는 이곳에서 신선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한다. 답답하게 시야를 가리던 그 참나무는 흉년에 대비할 수 있도록 가난한 서민들을 생각하고 앞을 멀리 내다보던 송순이 마음을 담아 직접 심은 것이라 하니 그 가치가 더 높아지는 듯했다.

조선시대 대표적 정원이라 하여 기대를 품었던 소쇄원은, 양산보(1503∼1557)가 지은 별세정원이다. 꾸며진 정원이라 하여 화려할 줄 알았더니,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인공적인 정원으로 보이지 않았다. 늦가을이라 약간의 쓸쓸함이 감돌기도 했지만, 개울에 흐를 물소리와, 바람에 일렁이던 대나무 숲의 소리에 몸과 마음이 시원해질 초록의 여름을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담양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무리하고 마지막 답사 종착지 광한루. 광한루에서만큼은 너나 없이 춘향이와 이도령이 되었다. 이번 답사를 통해 느낀 점은 앉아서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접 그 현장을 보는 것 또한 깊은 공부가 된다는 것을 겨우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 속에서 훌륭한 작품을 창작했던 우리 조상들의 숨결을 보다 가까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아쉬운 모든 일정이 끝나고 답사를 마무리하며 남원을 빠져나오는 길, 귓가에는 "부모불효 허는 놈과 형제화목 못하는 놈 차례로 잡아다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 버리고,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여 앉아 한 잔 더 먹소 자네 먹게 하면서 거드렁 거리고 놀아보세."라는 <사철가>의 마지막 대목이 잦아들고 있었다.

문정혜(국문 석사 1차)
이은영(인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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