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독일통일에서 본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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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04.06.0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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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긴 여정입니다
수도 이전도‘지방분권’고려했다

통일시대의 상징 수도(首都). 본(Bonn)이냐· 베를린(Berlin)이냐· 1991년 6월 20일 저녁 10시 연방의회 본회의장. 마지막 5분 발언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본과 베를린’을 주장했다. 독일전역이 긴장했다. 박빙이었다. 케스팅보트. 338대 320. ‘수도-베를린!’. 독일역사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400만 베를린 시민들은 환호했고, 30만 본 시민들은 눈물을 흘렸다. 독일의 분단과 자유의 상징 베를린. 연합군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던 도시. 붉은 바다에 뜬 고도(孤島). 독일-천도(遷都)’.
독일정치사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서독 민주주의를 성공시킨 임시수도. 40년 동안 행정수도였던 본. 본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었다. 반면 베를린은 독일통일과 유럽통합의 상징으로 부활하고 있었다. 1990년 8월 1일. 통일조약 제2차 협상이 계속되었다. 동독은 “서독법을 바로 도입한다”고 쉽게 합의했다. “도입하되 점진적으로 하자”고 요구했다. 서독법의 전면적 수용은 이렇게 합의되었다.
그러나 동독은 “수도, 의회, 정부 소재지를 베를린으로 하지 않을 경우 통일조약은 없다”고 위협했다. 서독은 “연방의회 많은 의원들이 베를린으로 옮기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이 문제는 독일총선 이후 독일연방의회에 넘기자”고 수정 제안했다. 동서독은 결국 이 타협안에 합의했다. 통일조약 제2조 제1항 “독일의 수도는 베를린이다. 의회와 행정부의 소재지는 독일통일이 이루어진 후에 결정한다.”
1990년 10월 3일 통일 이후에도 의회, 행정부 이전 논란은 계속되었다. 너무도 민감한 사안이었다. 국론분열이 일어날 만큼 대립이 심했다. 콜(CDU, 전수상, 73)은깃 ‘수도-베를린’에 관한 입장을 밝혔다. “장벽과 철조망. 이렇게 둘러쳐진 서베를린이 분단의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이 있어야 한다. 그 희망은 베를린이 다시 평화와 자유 속에 통일된 독일의 수도가 되는 것이다.” 전(前)사민당(SPD) 총재 빌리 브란트도 같은 입장이었다.

“이전비용 너무 많다” 반대론 비등

1991년 6월 20일 저녁. 338대 320. 수도 베를린. 독일의 전후 현대사를 함께 한 본 시민들은 이 결정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9년 본에서 제헌의회가 열렸고 독일연방공화국이 탄생했다. 임시수도, 행정수도였다. 본은 라인강과 베토벤의 생가와 함께 발전했다. 국회의사당, 대통령관저, 수상관저, 정부기관들이 이전한다는 소식에 얼마나 참담해 했겠는가.
1991년 12월. “1995년 수도 업무개시. 1999년 수도 이전완료. 베를린을 정치중심지로”라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독일정부는 본의 급격한 위축을 막기 위해 고심했다. 1994년 12월 ‘베를린-본 이전 법률안’이 통과되었다. “이전할 부처를 외무, 내무, 법무, 재무, 경제 등 핵심 10부처로 한정하며, 환경, 교육, 정보통신, 국방 등 8개 부처는 본에 그대로 두고, 행정요원 65%가 남는다”고 결정했다. 또 베를린과 본의 공정한 업무분할을 보장하고, 이전비용으로 20억 마르크를 상한선으로 정했다. 역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베를린 소재 연방철도청, 국토관리청 연방연구소, 연방통계청 베를린지부를 본으로 이전시키기로 결정했다. 연방상원도 잔류를 선언했다. 그럼에도 본의 로비는 계속되었다. “1998년 베를린 수도 이전 계획은 환상이다. 이전 경비가 최고 1,000억 마르크가 든다. 정부기관의 이사비용도 고려해야 한다. 국민들에게 새로운 부담만을 지울 것이다.”
“베를린 기존 건물을 최대한 활용하면 이전 기간을 단축하고,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신속한 이전은 동독국민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고, 이 지역 투자 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이다. 정부를 최대한 빨리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당시 그러나 콜 수상은 베를린신문에서 “정부, 의회 이전 이전에 또 다시 논란을 일으키는 시도를 단호히 배격한다. 시한 내 이전을 완료할 것임을 베를린 시민에게 약속한다”고 천명했다.
베를린은 사상 유래 없는 ‘지상 최대의 건설현장’으로 변해갔다. 마인츠 소재 ZDF (공영방송국), 본 소재 일간신문‘디벨트(Die Welt)’가 베를린으로 이전했다. 외국공관들도 속속 옮겨왔다. 1999년 12월. 독일정부는 계획대로 수도를 베를린으로 옮겼다. 본격적인 통일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지난 대선 기간 중 우리나라에서도 ‘천도논쟁(遷都論爭)’이 벌어졌다. 과도한 수도권 집중을 막고 지역을 균형 발전 시키겠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지방분권’에 집중해야한다. 한국통일의 긴 여정에서 볼 때, 수도 이전 논의는 너무 빠르고, 비현실적이며, 역사성도 없고, 경제력에 대한 충분한 고려도 없다. 지금은 수도 이전의 시기가 아니라고 본다. 통일 이후 북한지역의 재건은 중앙정부의 몫이 아니다. 모두 지방자치단체의 몫이다. 행정지원, 교육지원, 주민교류 모두 지방자치단체가 전담해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은 지방을 너무도 소외하고 있다. 독일통일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자매결연 시스템이다. 지방자치단체, 독자적인 통일대비 지원책이 있는가. 지방도 인재를 키워야 한다. ‘통일준비는 지방분권(地方分權)’에서 출발해야 한다.

통일은 인간과 정신의 융합

2002년 5월 28일. 남북 분단의 현장, 판문점. 199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독일출신 귄터 그라스(75)가 이 판문점을 방문했다. “이렇게 아름답고 목가적인 곳에 이런 군사적 정치적 긴장과 대림이 존재한다는 것은 마치 한 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것처럼 황당하다. 웃기는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인가.”
독일통일의 3백 29일(1989.11.9­1990.10.3). “통합속도가 너무 빠르다.” “지금 통일열차를 타지 못하면 영원히 못 탄다.” “자유 속에서 독일은 통일했다.” “하나로 통합된 유럽에서 독일은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독일의 코미디는 끝났다.
독일 통일의 교훈은 무엇인가? 서울을 방문한 귄터 글라스의 말이다. “예상보다 너무 빨리 되었다. 마음의 장벽이 생겼다. 흡수되어 동독경제의 기반이 무너졌다. 동독시민들은 이등시민으로 전락했다. 한국인들이 이점을 유념해야 한다. 통일은 제도와 체제의 통합이다. 그러나 그 전에 인간과 정신이 융합되어야 한다.”
주변국가들의 합의가 필요한가?“1989­1990년 2년 사이 서독정부는 구소련과 무려 20개의 조약과 협정을 체결했다. 경제뿐만 아니라 학문, 기술 등 전 분야에 걸쳐 협력이 이뤄졌다. 이를 통해 통일에 대한 경계심을 없앨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군사적인 안전보장이 담보되어 있었다.”

통일은 긴 여정이다

남북통일은 언제쯤 이루어질 것인가? 귄터 글라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도 통일로 가기까지 2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한국도 이런 상태가 그대로 가진 않지 않겠는가. 이성과 인내를 가지고 노력하면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서독과 동독 사이의 갈등은 없었는가? 독일은 브란트 총리가 70년대 후반 동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야당이던 기민당(CDU)의 거센 반대에 부딪쳤다. 브란트는 동서독 접근을 위해 소련의 재가가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제일 먼저 모스크바를 찾아갔다. 다음으로 폴란드를 방문해 국경을 재확인함으로써 독일이 동진할 의사가 없음을 천명했다. 이후 이산가족의 만남, 의료진 교류, 함부르크­베를린 간 고속도로 건설 등 점진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동방정책의 정신은 ‘접근을 통한 점진적인 변화’ 였다.
한국통일의 원칙은 무엇인가? 한국정부는 “헌법 전문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 통일이 달성될 때까지는 한국정부가 한민족 대변 유일한 합법정부이고, 한라에서 백두사이에 거주하는 7천만 한국민들까지 돌볼 의무가 있다.
미국, 일본과 긴밀한 협력관계가 필요한가? 또 중국, 러시아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 중국은 통일과정을 쉽게 할 수도 있고, 어렵게 할 수도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통일 이후의 안보환경은 이들 주변국가와 깊은 연대가 있어야 한다.
한국정부는 동아시아의 정책은 무엇인가? 평화를 주장해야 한다. 한국만의 독자적인 길은 없다고 안심시켜야 한다. 미국, 일본, 중국이 가입한 국제기구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대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현실이다.
한반도의 중립화 제의를 수용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세력 확장욕이 은폐되어 있다. 통일한국은 민족국가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새로운 연대를 향해 매진해야 한다. 21세기 동아시아의 새로운 협력시대의 표방이 핵심이다. 정말로 민족을 생각한다면 6.25와 같은 끔찍한 동족참극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햇볕정책은 용도폐기 되어야 하는가? 물론 한국 내에 대북 포용정책 비판이 있다. 그러나 햇볕정책을 고수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다. 북한과의 평화적 공존이 한국으로서는 사활이 걸린 것이 아닌가? 야당도 ‘평화적 공존’에 대해 이해를 달리할 수 없다. 그러나 공존을 위한 지원수단들이 투명해져야 한다.
한국인의 ‘통일에 대한 열망과 환상’ 은 문제가 있는가? 우리는 통일에 대해 말이 많다. 그러나 사실 너무 모른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누가 방해하는지, 누가 우리편인지,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 통일의 과정이 얼마나 험난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지. 그러나 또 분단이 왜 극복되어야 하는지 모른다.
통일은 긴 여정이다. 또 긴 호흡이 필요하다. 우리는 ‘통일의 원칙과 통합의 원칙’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 자유, 인권, 민주가 통일의 원칙이다. 헌법전문에 잘 표현되어 있다. 통일의 원칙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이 원칙에서 통합방안이 연구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다음에 올 홍수에 대비해 이들 제방들을 계속해서 개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이 앞으로 몰아닥칠 남북통일의 도전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 태 영 교수(법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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