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간다 해외봉사활동을 다녀와서
우간다 해외봉사활동을 다녀와서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05.09.01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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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활동은 앞으로 내 인생의 활력소로 다가올 것"
하계방학 중 '한국대학사회봉사협의회'에서 주관하는 '2005하계 한국대학생 해외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희(행정·4)학우가 우간다(7. 12. ∼ 8. 2.), 최혜인(교육·2)학우가 필리핀(7. 9. ∼ 7. 28.), 이언주(디자인·4)학우가 중국(7. 11. ∼ 7. 29.)에서 봉사활동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하였다. 향후 해외봉사 활동을 희망하는 학우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아프리카 우간다와 필리핀에서 봉사활동을 한 두 학우의 해외봉사활동 체험수기를 게재한다. <엮은이 말>

우연히 우간다 봉사 활동에 관한 정보를 접하게 되었고, 그 기회를 통하여 이번 봉사활동에 참여하여 보다 더 넓은 세계관을 확립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아프리카를 동경하게 되었고 내가 가진 것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해 오던 차에 '한국대학생사회봉사협의회'에서 주관하는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통해 참가하게 되었다. 신청접수를 마치고 가슴 졸이며 결과를 기다리면서 '우간다'에 대한 관심이 한 층 더 깊어졌으며 우간다 하계 봉사자로 선발되었음을 확인하던 그 순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출국을 며칠 앞두고 우간다 봉사 활동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과연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나눠 줄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여러 모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기대감과 두려움으로 우간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천 공항에서 이른 아침 1시 비행기로 출발하여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를 경유하여 케냐의 나이로비를 거쳐 우간다의 엔테베로 장장 15시간의 비행을 통해 도착할 수 있었다. 한국과의 시간차는 한국이 우간다보다 6시간 빨랐다. 엔테베 공항에서 수도 캄팔라로 한 시간 가량 이동하여 거기서 설렘과 어색함으로 우간다에서의 첫 날 밤을 보내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기상과 함께 체조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우간다에서의 첫날은 우선 환전과 생필품 구입 그리고 우간다 현지에서의 봉사활동 협력기관인 Food for Hungry International 사무실을 들러 우간다의 상황과 봉사활동에 관한 내용을 전해 들었다.

캄팔라에서의 이틀 간 유숙한 뒤 여전히 어색함과 설렘으로 수도 캄팔라를 뒤로 한 채 우리가 봉사활동을 할 쏘로티로 출발하였다. 먼지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6시간동안 달리면서 우간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거와 미래가 혼재한 수도 캄팔라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나 아프리카 하면 떠올리는 '동물의 왕국', '드넓은 초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쏘로티로 통하는 하나뿐인 도로를 공기를 마시듯 먼지를 마시며 달리면서 드문드문 보이는 나무들 사이로 "내가 과연 이 우간다 땅을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했다. 마침내 긴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쏘로티에 도착하여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모기에 물려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스런 맘으로 잠이 들었지만 어김없이 새로운 아침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난 후 우리가 앞으로 교육봉사를 하게 될 초등학교 3곳을 방문했다. 방문하는 학교마다 자기나라 고유의 전통춤과 노래로써 우리를 그들의 표현대로 '모스트 웰컴(most welcome)' 해 주었다. 자신들의 최고의 것으로 최대한으로 대접한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첫 인상은 나의 가슴속에서 쉬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난민촌을 방문하게 되었다. 내전으로 인해 피난을 오게 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다시 자기 고향으로 되돌아갔으나 아직까지 난민촌에는 오천 여명의 피난민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굶주림에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아이들…, 빈 젖을 어린 아이에게 물리고 우는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의 빈약한 젖가슴…, 스위트(sweet)라고 말하면서 사탕을 바라며 내미는 그들의 희망 잃은 조그마한 손을 눈시울이 뜨거워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난민촌을 떠나 우리가 하루를 숙박하며 우간다를 체험할 마을로 갔다.

마을 주민들 역시 우리를 뜨겁게 환영해 주었으며 우리는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각자가 묵을 집으로 향했다. 10분간을 꼬불꼬불한 들판 길을 걸어 전기도 들어오지 않으며 수도시설도 있지 않는 집에 도착했을 때 식구들 모두는 환성을 지르며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생활의 불편함 가운데서도 그들의 따스한 섬김의 손길과 배려의 마음으로 '고향에서의 하룻밤'을 보내었으며 달빛 아래에서의 만찬은 내 일생의 두 번 다시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장식될 것이다.

어느덧 3주간의 일정 속에 중반을 향해 치닫고 있었으며 시간의 흐름 속에 자연스레 우간다를 조금씩 알아 가고 있었다. 우리들은 음악, 체육, 미술, 기술, 그리고 의료팀으로 나뉘어져 기술팀은 초등학교 아이들을 위해 시소와 그네를 만들었으며 의료팀은 쏘로티 지역의 주민과 난민촌의 사람들을 위해 의료봉사 활동을 했으며 나머지 3개의 팀은 팀별로 교육 봉사활동을 하였다.

음악 팀의 기타반주로 교육봉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전에 해외 교육 봉사 경험이 없던 나에게는 아이들과의 대면 시간이 점차 부담감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우간다를 출발하기 전 한국에서의 모임에서 우리 음악 팀은 '우리가 단지 그들보다 먼저 알고 있는 것뿐이다',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는 것보다는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서로 배우는 시간을 가지자'라는 마음가짐으로 봉사에 임하자 라고 서로 이야기하고 다짐하였으므로 부담감이 점차 아이들에 대한 열의로 전환되어졌다.

아이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노래하고 즐거워하면서 점차 아이들과의 거리감이 상쇄되어져 갔으며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순수함을 아이들의 눈망울 속에서 발견할 수가 있었다. 비록 시계가 없어 시계를 볼 줄을 모르며 가위를 사용해 보지 않아 가위질을 할 수 없지만 비눗방울 하나에도 기뻐하며 마냥 즐거워하던 아이들의 얼굴은 어느 값진 보석과도 바꿀 수 없는 아프리카의 진정한 다이아몬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특히 그들의 삶 속에서 묻어 나오는 경쾌하고 활기찬 음악과 그들의 음악적 재능 그리고 춤은 보고 듣는 우리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면서 과연 저들을 불행하다 말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생활에 있어서는 불편함이 따르겠지만 그들의 주변 환경과 여건에 감사하며 즐겁게 살아가는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이 가진 자의 거만함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런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용기를 얻었다는 것에는 부인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 아이들과 헤어질 시간이 점차 다가왔으며 마지막 수업을 하면서 좀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없어서 모두들 아쉬워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마을 회관 건축 봉사를 하게 되었다.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마을 회관 건축을 위해 주민들은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었으며 회관 건축을 돕기 위해 온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서툰 솜씨였지만 회관 건축을 위해 우리 모두는 열심히 벽돌을 나르고 나무를 자르며 왕복 2km나 되는 거리로 물을 길으러 다녔다. 그러한 모습에 마을 주민들도 고마운 시선으로 우리들을 바라봐 주었고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더욱 더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였다. 비록 완공된 모습은 보지 못하고 왔지만 언젠가 꼭 한 번 들러 우리의 젊음의 땀을 쏟은 그 건물을 만져볼 날을 기대해본다.

교육봉사 활동을 마치고 우리는 쏘로티 사범대학을 방문하였다. 그들의 학교 시설과 기숙사를 먼저 둘러보고 본격적인 문화교류 행사를 시작하였다. 식순에 의해 먼저 각 나라의 국가(國歌)를 부르고 서로의 소개가 있은 후 먼저 우간다 전통 춤과 노래를 보여 주었다. 유연한 몸동작과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우간다의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 다음 우리들은 미리 준비한 우리의 전통 놀이인 사물놀이 공연을 했다. 단 하루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각 나라의 전통문화를 서로 공연함으로써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해 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바로 다음 날 우리는 'Korean Cultural Day'행사를 개최하였으며 주민들은 많은 관심으로 우리들을 성원해 주었다. 우간다 아이들이 교육봉사를 통해 배운 포크댄스와 태권도 시범을 할 때는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쏘로티 주민들은 태권도 시범을 보일 때는 열광했으며 사물놀이를 할 때는 처음 접해 보는 문화에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먼 이국땅에서 수많은 외국인이 운집한 가운데 애국가를 다 같이 하나가 되어 부를 때의 그 순간은 나의 가슴을 울리는 감동 그 자체였으며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조국이 있음에 다시 한 번 더 머리 숙여 감사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적으면서 다시 한 번 더 우간다를 생각해보며 내가 겪은 우간다에 대해 갈무리해 본다. 먼저 우리 모두가 건강한 모습으로 봉사활동을 마치게 된 것과 3주간의 여정가운데 서로의 다름과 부족함에 모두가 이해와 격려로 하나가 될 수 있었던 일이 참으로 감사하다.

우간다를 떠나오면서 많은 아쉬움과 생각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봉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헐벗고 굶주린 그들에게 나의 시간을 들이고 나의 물질을 조금 나눠주는 것보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눈높이로 바라보며 생각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운동장에서 해맑은 모습으로 뛰어다니며 같이 노래 부르고 율동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무엇보다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던 아이들과 학교 교정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며 때로 삶에 지치고 무기력할 때 언제든지 나에게 활력소로 다가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지면을 빌려 쏘로티의 아이들과 우간다에 진심 어린 마음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우간다 파이팅!!

한국희(행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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