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시기 경남지역 민간인 학살문제 발표 논문
한국전쟁시기 경남지역 민간인 학살문제 발표 논문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05.06.2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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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시기 여양리 민간인 학살의 실상과 성격

Ⅰ. 머리말


해방이후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사실이나 내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남에 따라, 관련 유족들 뿐만 아니라 학계나 일반인들의 관심이 점차로 높아지고 있다. 한국전쟁의 전 시기를 통하여 학살된 민간인의 수가 수만 또는 수십만 명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단지 추정치일 뿐 정확한 수는 파악되어 있지 않다. 또한 그들이 무슨 이유로 누구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는지도 분명하지 않으며, 각 사례별로 성격도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전쟁 발발 초기에 있었던 소위 국민보도연맹(이하 보도연맹으로 줄인다.) 관련자 학살은 피해자의 수나 피해 범위로 볼 때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해방 공간의 극심한 좌우 대립 속에서 이들은 대부분 좌익분자로 지목되어 있었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어쩌면 죽어서 마땅한 것으로 치부된 채 5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이후 학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라도 되는 것처럼 아주 미약하게 다루어졌고, 단지 언론보도 등을 통해 사회적인 문제로 가끔 제기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도 수십만에 이르는 민간인의 시신이 여기저기에 널부러져 있고, 유족들은 자신의 가족이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 채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거창 신원면이나 노근리에서는 가해자가 국군이나 미군임이 분명하고 피해자가 마을 주민이나 피난민 등의 양민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세인들의 이목과 관심이 집중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도연맹 관련자 학살사건의 경우는 그들이 좌익분자였다는 점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물론 유족의 처지에서 사건의 진상규명조차 주장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2002년 9월 태풍 루사로 인해 경남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에서 한국전쟁 초기에 학살․매장된 민간인의 유해가 노출된 것을 계기로, 2004년 4월~6월에는 이곳에서 학살된 민간인의 매장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최초로 정상적인 과정을 거친 이 발굴에서는, 3개 지점 7개소에서 163구의 시신이 수습되었다. 아울러 학살 당시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많은 자료(탄피와 각종 유류품, 소지품 등)들도 함께 발굴되었다. 발굴과정에 드러난 여러 가지 정황과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여양리 일대에서 있었던 학살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음은 물론, 보도연맹과 관련된 학살사건의 한 단면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단지 좌익분자 혹은 좌익에 연루된 사람들이 학살된 것으로 여겨져 왔으나, 여양리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의 증언을 종합한 결과 학살된 민간인은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학문적인 입장에서 여양리와 같은 민간인 학살사건의 실태를 파악하여 성격을 명확하게 규명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가해자의 성격과 사건의 전개 과정, 피해자의 신분과 성격 등을 분명히 함으로써, 역사적인 맥락에서 진상을 규명할 수 있는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전쟁시기에 학살된 민간인, 그 중에서도 특히 보도연맹과 관련된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개괄적으로만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각 지역에서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검토하여, 사건과 배경과 진행과정, 학살자 또는 피학살자의 성격 등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한 예는 많지 않다. 이 글에서는 발굴의 내용과 증언을 종합하여 마산 여양리에서의 학살사건 전체를 재구성하는 동시에,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격, 동원된 주민들의 입장 등의 측면에서 재조명하고자 한다. 나아가, 경남지역에서만 수십개소에 이르는 학살사건에 대해 향후 어떤 방향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며,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런 작업이 전제가 되어야만, 현재 정부 또는 정치권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과거사 청산’ 작업의 방향에 대해서도 모색이 가능할 것이다.

Ⅱ. 마산 진전면 여양리 학살지 발굴조사 개관


1. 경과


2002년 8월 31일에서 9월 1일 사이에 태풍 루사가 한반도의 중심을 강타하면서 엄청난 양의 폭우가 쏟아졌다. 9월 5일경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 밭에 수십점의 유골이 흩어져 있는 것을 주민이 발견하였고, 이후 여양리 학살사건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접근이 시도되었다.

이 일이 언론에 보도된 직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산하 진주유족회’(회장 이용진)와 ‘동 대책위원회’(집행위원장 조현기)가 결성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마산시와 협의하여 당시 지표에 흩어져 있던 유골들을 수습되어 인근에 일단 가매장하였다. 이후 마산시와의 지속적인 협의 결과, 2003년 마산시에서는 유골이 매장되었다고 알려진 여양리 산태골 일대의 임야 수만평을 매입하고, 기 수습하여 가매장한 유골과 산태골 숯막의 유골을 추가로 수습하여 정식으로 매장할 것을 합의하였다. ‘대책위원회’는 여양리 유족찾기운동을 전개하여 현재 80여명의 유족을 확보하였다. 피학살자의 출신지일 가능성이 높은 진주시에도 마산시와 비슷한 내용의 협조를 요청했지만, 유골 발견장소가 행정구역상 마산시라는 이유 때문에 거부되었다.

2004년 4월 24일부터 산태골 숯막에 남아있다고 판단되는 유골에 대한 발굴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작업은 2003년 마산시와 유족회․대책위원회와의 합의사항을 이행의 일환으로, 발굴과 매장에 소요되는 비용 일체를 마산시가 부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발굴은 포클레인과 인부를 동원한 유골 수습작업 방식으로, 지금까지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진 유해수습작업과 동일한 형태였다.

2004년 4월 28일 필자가 유해수습작업 사실을 인지하고 조현기위원장과 함께 현장을 방문한 결과 수습작업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책위원회와 논의하여 장비와 인부를 철수시키고, 이후의 유해발굴작업에 필요한 인력 동원과 비용부담, 수습된 유골의 보관․관리 일체를 경남대학교박물관이 담당할 것을 제안하였다. 며칠간의 준비를 거쳐 2004년 5월 3일 경남대학교 발굴팀이 현장작업에 착수하였고, 동 5월 28일에는 대책위원회와 함께 발굴작업 중간보고 겸 기자회견을 가졌다. 6월 30일 현장에서의 발굴작업을 완료하였다. 발굴팀은 경남대학교박물관 연구원과 조교, 경남대학교 사학과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과 1~4학년 학부생 등 20여명으로 구성하였다.


2. 발굴의 배경과 목적


2004년 4월 26일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민간인의 유해가 인부들에 의해 수습되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기사 내용과 게재된 사진을 보고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이 발굴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대책위원회 조현기위원장과 접촉하여 현장을 방문하고 실태를 파악하였다. 4월 24일 착수한 산태골 숯막의 유해수습작업은 이미 완료된 상태였고, 방문 당일인 4월 28일부터 폐광에서 작업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폐광 밖에는 비료푸대에 담긴 두개골 등 유골이 보였다. 인부를 동원하여 이처럼 무질서하게 작업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그 자리에서 인부를 철수시킨 후 현장 일체와 기 수습된 유골 전부를 경남대학교박물관에서 인수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향후 수습작업에 소요되는 비용 일체는 발굴팀이 부담하기로 하였다. 이후 작업계획을 세우고 발굴팀을 구성하여 5월 3일부터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과정에서의 모든 논의는 대책위원회 조현기위원장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현장을 인수한 이후 발굴 진행을 비롯한 현장에 관한 모든 사항은 발굴팀에서 맡아 처리하였다.

필자가 자발적으로 이 작업에 참여하기로 한 것은 특정한 이념이나 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다. 이들은 왜 붙잡혀가는지 그 이유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죽임을 당하였고, 일정한 과정을 거쳐 정상적으로 매장된 것도 아니었다. 수십명이 한 구덩이에 집단으로 매장당한 채 머리와 팔다리가 빗물에 쓸려 흩어지고 있으며, 또다시 대충 수습하여 한 석관에서 한 몸이 분리된 채 집단적으로 매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되었다. 인부들이 시신을 온전하게 수습하는 것이 아니므로, 수습작업이 끝난 뒤에도 여기저기에 뼛조각이 굴러다니고 있는 것이 당시의 사정이었다. 설령 이들이 당시 보도연맹과 관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념과는 관계없이 한 인간으로서 대우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유해가 수습되어야 하며, 가능한 최대한의 방법을 동원하여 유족을 찾아 유골이나마 돌려주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 당초 발굴의 목적이었다.

3. 유해 발굴의 내용


주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이 일대를 샅샅이 훑은 결과, 확인된 매장지는 3개 지점 7개소였다. 적어도 이 골짜기 안에 있는 매장지는 모두 발굴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인부들이 대충 수습한 숯막부터 시작하여 여러 매장지를 동시에 발굴하였다. 발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기록이나 유골의 정리를 위해, 주민들이 부르는 이름을 참고하여 편의상 지역을 구분하고나 구덩이의 이름을 다음과 같이 부과하였다.

- 산태골 숯막지역(1개소) : 인부들이 기 수습한 곳. 숯막 그 자체

- 너덜겅지역(2개소) : 1호 돌무지, 2호 돌무지

- 폐광지역(4개소) : 폐광, 3호 돌무지(上), 3호 돌무지(下), 4호 돌무지

이 외에도 주민들의 증언이나 기억하는 내용을 근거로 하여 주변 일대를 답사하였으나 다른 매장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적어도 여양리 골짜기에서는 이번에 발굴된 7개소가 매장지 전부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마을로 내려갔다가 사살당한 柳氏의 경우는 제외)


1) 작업방법

유해 발굴작업은 일반적으로 유적을 발굴하는 것과 동일하게 고고학적인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외형상 매장지라고 판단되는 곳이 확인되면, 상부에서부터 흙이나 돌을 제거하면서 유해를 그 자리에 있는 상태 그대로 노출하였다. 노출된 유해는 매장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1구씩 개별적으로 파악하고, 이러한 판단을 기초로 하여 현장에서 전체를 1/10 크기로 실측하였다. 노출 과정에서 확인되는 허리띠, 반지, 단추 등 개인 소지품이나 유류품은 물론, 탄피나 탄두 등도 가능한 한 본래의 위치를 파악하여 도면에 삽입하였다. 노출된 모든 유해는 모두 번호를 주어 1구씩 따로 수습하였고, 이 과정에서 그 유해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되는 유류품도 유해와 같은 번호를 주어 수습하였다. 다만 이 매장지는 고고학적인 분묘와는 성격이 다르므로, 매장지의 특징 등을 파악하여 기록하고 사진으로 남기는 방법 외에 따로 실측하지는 않았다.


2) 조사내용


(1) 산태골 숯막지역

이곳은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태풍 루사때 유골이 떠내려와 흩어져 있던 곳으로, 4월 24일부터 인부들에 의해 이미 유해가 수습된 곳이다. 작은 골짜기 옆에 움푹 패인 凹地가 있는데, 과거에 이곳에서 숯을 굽는 사람이 임시로 거처하던 움막이 있었다고 한다. 증언에 따르면 움막이 있었던 凹地에 시신을 넣고 흙을 덮었다고 하는데, 갑작스런 폭우로 골짜기의 물이 넘쳐 이곳을 쓸고 지나가면서 유골이 노출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발굴에 착수할 당시 숯막은 인부들에 의해 다시 매몰된 상태였고, 이곳에서 수습된 유해는 합동 안장을 위해 마산시에서 설치한 석관에 안치되어 있었다.(2002년 태풍 루사 때 수습하여 가매장한 유골+2004년 인부에 의해 수습된 유골) 숯막에 미처 수습되지 않은 유해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매몰된 흙과 자갈을 모두 제거하는 동시에 범위를 넓혀 다시 확인작업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유골이 발굴되었고, 彈頭 등도 추가로 확보하였다. 숯막의 원래 바닥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아래까지 파서 확인하고 숯막에서의 작업을 완료하였다. 이미 포클레인에 의해 매장지가 상당부분 훼손되었기 때문에 매장 당시의 자세한 상황은 파악할 수 없었다.

석관 내에 안치해 둔 유골을 모두 꺼내어 확인한 결과, 이곳에는 36명 이상이 매장되었다고 판단되었다. 허리띠, M₁탄피와 탄두 등이 함께 나왔다.


(2) 너덜겅지역(돌무지 1호, 돌무지 2호)

마을 주민의 증언으로 새롭게 확인된 곳이다. 산의 사면에 많은 돌이 흘러내려온 곳을 너덜겅이라 부르는데, 그 중간지점에 동쪽으로 치우쳐 2개의 돌무지가 있었다. 2기 모두 경사면의 낮은 쪽에는 큰 돌로 석축처럼 쌓았기 때문에, 외형상 쉽게 매장지임을 판단할 수 있었다.

① 1호 돌무지 : 너덜겅 가장자리 부분의 돌을 들어내어 얕은 구덩이를 만들고, 그 속에 시신을 매장하였다. 주위에 있는 큰 돌을 굴려서 경사면의 낮은 쪽에 놓고, 다시 매장한 시신 상부에 돌을 얹어서 돌무지를 만들었다. 구덩이 바닥의 경사가 급한 곳이어서, 높은 쪽에 기대 세운 시신이 아래로 밀려 내려와 뒤섞여 있는 상태였다. 돌 위에 얹혔던 유골들이 돌 틈새로 흘러내렸거나 부분적으로는 시신을 2겹으로 겹쳐둔 곳도 있어, 유해를 1구씩 온전하게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유해의 기본적인 배치는 나름대로 정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는 모두 29명이 매장되었고, 허리띠, M₁탄피, 단추, 비닐팩, 동전, 고무줄 등이 나왔다. 대퇴골에 彈頭가 그대로 박혀 있는 예가 있었다. 이곳에서 허리띠가 많이 나왔다.

② 2호 돌무지 : 너덜겅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숲 속에 위치하는 매장지이다. 낮은 쪽의 석축이 성황당처럼 정연하게 쌓여져 있었기 때문에, 한눈에 매장지임을 알 수가 있었다. 원래 있던 돌을 들어내어 얕은 구덩이를 만들었고, 바닥은 비교적 잔돌로 고른 듯하였다. 머리와 다리가 뒤섞여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유해를 가지런하게 놓으려 한 의도가 보였다. 구덩이 벽에 시신을 기대세운 경우에는 두개골이나 상반부 뼈들이 아래쪽으로 흘러내려 판단에 어려움이 있었다. 북쪽 일부분은 4개의 두개골이 나란하게 있는 경우도 있다. 이 부분은 최초에 유해를 가지런하게 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28명이 매장되었고, 허리띠, 신발, 단추, 반지, MG50 탄피, M₁탄피 등이 함께 나왔다. 손가락에 반지를 그대로 끼고 있는 예가 있었다. 이 2호 돌무지에서 특히 허리띠가 많은 점이 특징이다.


(3) 폐광지역(폐광, 돌무지 3호(上․下), 돌무지 4호)

① 폐광 : 증언에 따르면 폐광 내부에 유해가 집중되어 있다고 하였고, 4월 28일 아침에 인부들에 의해 일부 유골이 수습되고 있었다. 최초 발견당시 동굴의 입구는 나무를 걸치고 그 위에 돌과 흙을 덧대어 입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봉해 진 상태였다. 안쪽에 수직갱이 있다는 증언이 있었으나 폐광 안쪽의 전체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일단 입구 가까이에 있는 유해들을 먼저 정리하고 점차 내부로 진입하기로 하였다. 동굴 내부는 일부 훼손되기는 하였지만, 비교적 원래의 상태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입구에 있는 유해를 전면적으로 노출하여 그 상태를 파악하였다. 동굴의 특성상 내부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어 전체적으로 매우 습하고 눅눅하였다. 따라서 유해의 피부나 살 일부와 머리카락 등이 남아있었고, 옷 등의 유기물도 완전히 썩지 않은 상태였다. 동굴 바닥에 몇 개의 돌을 놓고 나뭇가지 등을 얼기설기 깔아 시신을 눕힌 것으로 판단되었다. 유해는 모두 동굴의 입구에만 몰려 있었을 뿐 안쪽 깊숙한 부분에는 매장되지 않았다. 물론 수직갱도 없었다. 매장 인원이 매우 많을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폐광 내에서는 23명이 매장된 것으로 판단되며, 옷, 종이, 단추, 안경, 허리띠, 도장, 젓가락, 구두주걱 등이 함께 나왔다.

특기할 점은 양복 상의를 입고 있는 20대 남자의 유해이다. 양복 주머니에서는 젓가락, 열쇠고리, 구두주걱 등과 함께 나무로 만든 도장이 나왔다. 이 도장에는 姓 없이 ‘泰仁’이라는 이름만 새겨져 있었다. 양복 안주머니 위에는 양복점의 이름으로 판단되는 ‘大松’이라는 글자도 있었다. 유골 사이에서는 소속이 분명하지 않은 종이가 있었는데, ‘光仲李尙’이라는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다른 글자도 있으나 종이가 겹쳐져 판독하기 어려웠다.

② 3호 돌무지(下) : 폐광 입구의 개울 건너편에 위치하는 3호 돌무지는 아무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고 있던 것이었다. 외곽에 3단 가량의 석축이 쌓여 있고 윗부분에도 드문드문 돌이 보였다. 마치 큰 무덤의 봉분처럼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외형상 인위적으로 만든 돌무지임을 알 수 있었다. 돌무지라고 명명하였지만, 이곳은 돌무지 의에 다시 흙이 덮혀 있었다.

3호 돌무지(上) 아래에서 발견된 매장지이다. 경사면의 낮은 쪽 가장자리에 돌을 쌓아올려 타원형의 구획을 만들고, 시신을 매장한 뒤 흙과 돌로 덮었다. 이 과정에서 산의 사면을 깎아내려 평평하고 넓은 대지를 조성한 후 3호 上 매장지를 만들었다.

이곳에는 모두 15명이 매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유해의 부식이 심한 상태라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허리띠, 단추, 안경, 숟가락, 열쇠, 고무줄 등이 나왔다.

③ 3호 돌무지(上) : 3호 下를 묻는 과정에서 산의 사면을 깎아내고 지면을 파서 평평한 대지를 조성하고, 그 위에 시신을 안치하였다. 유해는 두 겹 또는 그 이상으로 보이며, 대체로 가지런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구덩이의 중앙부에는 다리가 서로 마주보면서 엇갈리게 두 줄로 가지런하게 유해를 눕혔고, 다시 구덩이의 외곽 부분은 구덩이의 윤곽을 따라 배열하였다. 무질서하거나 포개지 않으려고 한 노력이 보였다. 이곳에서는 엎어진 상태로 매장된 유해가 많았다. 27명이 매장된 것으로 확인되었고, 허리띠, 단추, 반지, 빗, M₁탄피 등이 함께 나왔다. 신분증을 넣었던 것으로 보이는 비닐주머니가 1점 있다.

④ 4호 돌무지 : 폐광 앞을 흐르는 개울을 따라 50m 가량 내려간 곳으로, 가장 늦게 확인된 돌무지이다. 발견 당시 외형상 인위적인 돌무지임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돌이 쌓여져 있었는데, 다른 돌무지에 비해 규모가 매우 작았다. 이곳에는 모두 5명이 매장되어 있는데, 비교적 가지런하게 배치되어 있다. 단추와 허리띠 1점이 있는데, 허리띠는 머리 부근에서 출토되었다.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4. 발굴결과


아래 표는 현재까지 정리한 유해와 유품 현황이다.

매장형태

유해의 수

유류품/소지품

군용품

비고

A群

산태골

숯막

움막 속

36+α

허리띠10

탄피2(M1), 탄두1

B群

1호 돌무지

돌무지

29

허리띠9, 단추, 비닐팩1, 동전1, 고무줄

탄피13(M1 11, 칼빈 2), M1클립, 탄두4

2호 돌무지

돌무지

28

허리띠10, 단추, 반지1, 신발 3짝, 고무줄,

탄피5(M1 3, MG50 2), 철제품2

C群

3호 돌무지 (上)

27

허리띠1, 단추, 반지2, 비닐팩1, 빗1, 고무줄

탄피3(M1)

괭이1

3호 돌무지 (下)

흙+돌

15+α

허리띠, 단추, 안경1, 숟가락1, 열쇠1, 고무줄

탄두1

4호 돌무지

돌무지

5

허리띠1, 단추4

폐광

동굴 속

23

허리띠, 단추, 안경1, 젓가락1, 도장, 양복상의, 구두주걱, 종이(인쇄된 것), 고무줄

163+α


발굴을 통해서 확인된 사망자의 수는 163명이다. 그러나 당시 실제로 끌려왔던 사람의 수는 이보다 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숯막에서 미처 수습되지 못한 상태에서 유실된 유골과 부식되어 확인되지 않은 유해 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종합하면 여양리 산태골에서 학살된 민간인은 대략 180여명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1) 매장지의 특징

최초 발굴을 시작할 당시까지도 여양리 골짜기의 주 매장지는 숯막과 폐광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특히 폐광에는 수백 명이 묻혀 있는데, 垂直坑이 있어 매장당시 동굴 안으로 시신을 던져 넣으면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떨어지는 소리가 쿵 하고 들렸다고 하는 증언이 있었다. 따라서 발굴 초기부터 가장 어려운 작업이 폐광일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더구나 수직갱이 있는 경우 과연 유골들을 제대로 수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강하게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발굴 결과 폐광에는 입구에만 시신을 안치하였으며, 그 숫자도 다른 돌무지에 비해 많은 편이 아니었다. 따라서 가해자가 폐광의 존재를 미리 인지하고, 폐광에 묻을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은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결국 여양리에서는 3개 지역의 매장지가 있는데, 산에 난 소로를 따라 갈 경우 각 매장지는 서로 수백m 이상 떨어져 있다. 따라서 180여명 전체를 한곳에서 사살한 후 각 매장지로 옮겨서 묻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상태에서 3개 그룹으로 나누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위 표의 A~C群) 특히 C군의 경우 40명 이상이 매장된 3호 돌무지가 중심이며, 4호 돌무지에 매장된 사람들은 학살지점에서 곧바로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경사면 아래쪽으로 기어 내려온 몇몇일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되었다. 이러한 群 구분은 뒤에서 검토하게 될 사살지점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2) 발굴된 유물의 특징

발굴에서 출토된 유물은 당시 이곳으로 끌려온 민간인들이 소지하거나 옷에 부착되었던 遺留品과 가해자 관련 軍用品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유류품 가운데 소지품은 비닐팩, 반지, 안경, 빗, 수저, 열쇠고리, 도장, 인쇄된 종이 등이며, 의복과 관련된 물건은 허리띠, 단추, 고무줄, 신발 등이다. 이 가운데 신분이나 당시의 정황 파악에 도움이 되는 몇몇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민간인 유류품

① 비닐팩 : 크기나 형태로 보아 신분증을 넣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발굴 당시 속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신분증은 이미 압수당하고 비닐팩만 주머니(주로 바지주머니)에 넣고 있었던 것 같다.

② 반지 : 모두 3점이 출토되었다. 당시 반지가 흔한 물건이 아니며 반지가 가지는 특징과 의미(결혼 등의 특별한 약속) 등을 고려한다면, 가까운 가족이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유품이다. 손가락에 반지가 걸린 채 출토된 경우도 있었다.

③ 도장 : 신원 확인에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는 물건이다. ‘泰仁’의 추적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한다.

④ 인쇄된 종이 : 개인의 메모가 아니어서 특징이 되기에는 흠이 있다. ‘…光仲李尙…’

⑤ 허리띠 : 수가 매우 많을 뿐 아니라 버클에 특징이 있는 것이 많다. ‘ㄷㅗㄱㄹㅣㅂ KOREA', 'LIBERTY', 'W'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거나 부엉이그림에 ’미술‘, 여자 하키선수 등도 특징이 될 것 같다. 부엉이 그림에 ‘미술’은 어느 학교의 미술반 기념 버클인 것 같다. 특히 허리띠는 바지의 종류를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⑥ 특징이 없는 유류품 : 의복 관련 물건들(단추, 고무줄, 신발 등)이나 일반적인 물건(안경, 빗, 수저 등)은 특정인을 가리기 어려운 것들이다. 단추들은 여름 남방용이 대부분이고, 고무줄은 한복 바지의 경우에 해당될 것으로 판단된다. 양복 上衣, 특히 ‘大松’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양복은 특징이 될 수 있다.

그 외에 민간인의 유류품은 아니지만 齒牙를 수리한 흔적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의 치아 관리 실상을 고려할 때 신원 확인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2) 군용품

가해자의 성격이나 학살을 구체적으로 입증해 주는 유물이다. 군용 물품으로 출토된 것은 탄피(MG50, M1, 칼빈)와 탄두(M1), M1탄창, MG50 실탄 연결고리 등이다. 이들 대부분은 매장지 내에서 유골과 함께 출토되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매장지 내에서 유해와 함께 탄피들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시신을 매장지로 옮겨온 이후 근접사격, 즉 확인사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자료이다. 또한 발굴된 소총 관련 물품은 대부분 M1의 탄두나 탄피이다. 이 소총은 미군의 주력 개인화기였던 것이 당시 한국군에 처음 보급되기 시작한 것으로, 경찰이 주로 사용하던 칼빈이나 99식 소총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경찰이나 청년단 등의 조직이 아닌 正規軍만이 사용하였던 무기라는 점은 가해자의 성격 파악에 중요한 단서이다.



Ⅲ. 여양리 학살사건의 실태와 성격, 의의, 문제점


1. 여양리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신분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곳에 와서 학살되었는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의 신원을 포함한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기가 어렵다. 다만 생존자나 주민의 증언, 발굴에서 출토된 유품 등을 통해 그 성격 일부를 판단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당시 확실하게 여양리에 끌려왔던 사람은 다음과 같다.

① 泰仁 : 나이는 20대 초반이고 이름은 泰仁이다. 키는 165㎝, 머리카락은 直毛이다. 골격이나 몸매는 여성처럼 연약한 편이다. ‘大松’양복점에서 만든 2버턴 형식 양복을 입었고, 구두주걱과 열쇠가 달린 열쇠고리를 소지하였다. 주머니에 목도장을 가지고 다녔다.

② 이반성면 거주 李氏 : 여양리 학살지에서 살아서 집으로 돌아간 분이다. 이후 계속 고향인 진주 이반성면에서 거주하다가 3년 전에 작고하였다. 당시 농민이며 無學이었다고 한다.

③ 문산읍 청천 거주 李氏 : 현재 문산읍 청천에 거주하는 李某氏의 부친이다. 현재 여양리 옥방마을에 거주하는 주민이 李氏가 여기에서 사살되었음을 그 아들인 李某氏에게 확인해 주었다. 그분의 친척이 청천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전부터 알던 사이라 한다. 李氏는 당시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李氏의 부인(李某氏의 어머니, 현재 생존)은 남편이 무엇 때문에 끌려갔는지 그 이유조차도 알 수 없이 죽었다고 한다. 발굴한 163구속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아들이 있으므로 DNA분석을 통해 찾을 가능성이 높다.(1/163)

④ 진주거주 柳氏 : 20대 초반의 남자이다. 3대독자이며 부친은 진주에서 이발소를 경영했다고 한다. 학살이 있던날 저녁에 살아서 마을까지 내려와 밥을 청해서 먹고 본인의 신분에 대해 얘기하였다고 한다. 주민 신고로 지서로 연행되었으며, 다음날 경찰에 의해 사살되어 지서 근처 별도의 장소에 매장되었다. 여양리 사망자 중에서 발굴되지 않은 유일한 경우이다.

⑤ 하동 鄭氏 : 하동에 거주하던 정씨인지 본관이 하동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주민들이 학살지에 갔을 때 피를 흘리는 상태로 살아있었다고 한다. ‘나는 하동 鄭氏다. 어차피 살 수 없을테니 그대로 묻어라’고 했다고 한다. 그대로 묻혔다.

⑥ 진주 미천면 具氏․文氏 一族 : 현재 진주 미천면에 거주하는 具某氏와 文某氏의 일족으로 그 마을에서 10명이 끌려갔다가 2명이 살아서 돌아왔다. 당시 생존자의 말로는 ‘함안 방어산 밑’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그곳이 여양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모두 농사를 짓는 평범한 농민이었는데, 밭에서 일하다가 지서의 호출로 바지만 갈아입고 나갔다고 한다. 아랫동네와 윗동네의 알력 때문에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되었다고 한다. 具某氏의 부친은 당시 39세였고, 부자가 함께 끌려간 경우도 있었다.


이상이 여양리에 끌려온 사람들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다른 지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농민인 경우가 많으며, 본의 아니게 보도연맹에 가입되기도 하였다. 사건 당시까지 집에서 일상적인 생활을 하였으며, 영문도 모른 채 호출되었다가 그대로 死地로 향했다.

발굴된 유류품으로 보는 한 이들은 모두 평상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교도소 재소자는 아니었다고 판단되었다.

2. 여양리 학살사건의 경과


여기에서는 마을 주민들의 증언과 당시 생존자의 증언, 발굴결과 등을 토대로 하여, 여양리 학살사건의 전개 과정을 재구성 해 보고자 한다.

1950년 7월 15일(음력 6월 1일)경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등 경남 서부지역(진주 이반성면, 진주시 문산읍, 진주시, 하동군, 진주시 미천면 등)에 거주하는 보도연맹원들은 면사무소, 지서, 군청 등에서 잠시 와 보라는 호출을 받고 평상복 그대로 집을 나섰다. 이들은 대부분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있었기는 하였지만, 교도소에 수감되거나 한 중죄인은 아니었다.(이미 면죄부를 받고 집에서 일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들) 경찰서를 거쳐 진주교도소에 집결하여 일주일가량 수용되어 있었다. 출토된 유류품, 특히 의복의 상태로 보아 죄수는 아니며, 교도소에 잠시 수용되었던 사람들이었다.

인민군이 서남쪽으로 진출해 오던 1950년 7월 21일 낮 12시 경, 이들은 쓰리쿼터 1대와 트럭 4대에 태워져 여양리 골짜기로 들어왔다. 당시 트럭에는 웅크린 사람들이 타고 있었고, 총을 든 군인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이들 차량은 여양리 여항초등학교 담장 바깥 길가에서 차를 세우고 일정시간 대기하였으며, 이때 학생이나 주민, 점심을 먹으러 가던 교사의 눈에 목격되었다. 이동해 온 전체 인원은 민간인 180여명, 군인 40여명이었다. 처음부터 장소를 정하여 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곳에서 대기하면서 (현지 경찰의 도움을 받아) 학살 또는 매장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던 중이었던 것 같다.

다시 차량이 골짜기 안쪽으로 이동하였고,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숯막 근처에서 하차시킨 뒤 전체를 3개 그룹으로 분리하였다. 먼저 숯막 쪽으로 50여명이 가고, 나머지 130여명은 다시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 산으로 접어들어서는 너덜겅 60여명과 폐광 70여명으로 다시 나누어졌다. 3개 지역에서 각각 별도로 사살이 이루어졌다. 사살 지점은 분명하지 않으나 매장지와 가까운 옆쪽 또는 조금 위였을 것이다. 폐광의 경우 3호 돌무지 위쪽 묘가 있는 약간의 공터가 사살지점이었던 것 같다. 경찰에 의해 마을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부역자로 차출되어 현장에 왔다. 이 시점에 군인들은 대부분 철수하고 일부만 남아 있었다. 주민들은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옮겨와서 가지런하게 뉘였다. 이 무렵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이 있었고, 군인들은 매장지에 누워있는 그들에게 다시 총을 쏘아 확인사살하였다. 鄭氏(하동의 정씨? 하동정씨?) 역시 숨이 붙어 있기는 하였으나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마을 주민에게 ‘나는 하동 정씨다. 어차피 살 수 없으니 그대로 묻어 달라’고 주문하여 산채로 땅에 묻혔다. 이 와중에서 20대의 柳氏는 어둠을 타서 겨우 마을로 기어 내려갔고, 이반성면에 사는 李氏는 눈을 피해 집으로 도망쳤다.

군인들은 뒤를 경찰에게 맡기고 모두 철수하였고, 경찰은 주민들을 독려하여 시신을 모두 매장하였다. 사건을 주도하여 학살한 것은 군인이고, 경찰은 주민을 동원하여 시신의 매장하는 등의 뒤처리를 담당하였다. 동원된 군인의 수는 1개 소대병력 정도였다. 모든 사람들을 완전히 죽이기 위해 확인사살까지 하였고, 그 와중에 주민을 동원하여 시신을 매장함으로써 사건 자체를 은폐하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주민들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해, 그나마 시신을 곧게 펴서 반듯하게 눕히고 돌을 쌓아 짐승들이 시신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동굴의 경우 나무를 베어 입구에 걸치고 흙을 깎아내려 입구를 완전히 봉해버렸다. 군인이나 경찰은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민들은 동물들이 시신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하는 同床異夢 속에서 결과는 동일하게 되었다.

3. 여양리 유해 발굴의 의의와 문제점


다른 지역의 보도연맹 관련 학살사건과 마찬가지로, 여양리 학살사건은 국가의 공권력이 국민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사건이다.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와, 좌․우 이념의 극단적 대립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작용한 결과이다. 55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학살사건과 관련된 구체적인 움직임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여양리의 경우 태풍에 의한 우연한 발견이 지방자치단체의 민원해결 노력과 맞물려 (마산시 주민자치과 담당) 그나마 이 정도까지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몰론 그 동안 유족회나 대책위원회의 끈질긴 노력도 큰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여양리 한 예만을 가지고 한국전쟁 시기의 민간인 학살, 특히 보도연맹과 관련된 학살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것은 아니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며, 이 발굴 결과 밝혀진 내용들은 다양한 사례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번 발굴에서는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의를 찾고 싶다.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여러 방법들이 있겠지만, 많은 정보들은 결국 현장에서 확인이 가능한 것이다. 더구나 학살된 사람들의 시신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한, 그것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발굴이 능사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이 꼭 필요한 작업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한편, 발굴을 진행하면서 부딪치는 문제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한국전쟁시기에 학살된 민간인 매장지 발굴은 아직 아무런 체계가 없다. 여양리의 경우 매장지 전체를 마산시가 매입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다른 지역의 매장지는 대부분 사유지이므로 발굴작업은 물론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더구나 유해 발굴에 대한 법적, 제도적 근거가 전혀 없으므로, 행정적으로 아무 조치도 없이 누구나 발굴해도 되는 것이다. 매장된 유해는 아직까지도 국가의 관리 대상이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임의로 다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동안 여러 지역에서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언론 보도들이 있었다. 그 대부분은 유족 또는 매장지 주민들의 증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여양리의 경우에도 이곳에서 민간이 학살되었다는 사실이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고, 증언을 토대로 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보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발굴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확인한 바로는, 증언이 반드시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었다. 증언자는 대부분 당시 10대 후반 또는 20대의 젊은 나이였고, 이미 5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평생에 한번도 겪기 어려운 충격적인 상황을 접한 그들은 매우 당황하였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매장지의 위치, 사살된 날짜와 시간, 끌려온 사람의 수, 동굴의 상태, 사살지점 등 여러 점에서 엇갈리는 증언들이 있었고, 사실이 아닌 경우도 적지 않았다. 증언을 자료로 채택하기 위해서는 질문의 방법, 증언에 관한 객관성 검토, 다른 사람의 경험인지 여부, 증언자의 개인적인 성향 등이 면밀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 같다.



Ⅳ. 향후의 대책과 접근방향에 대한 제안


여양리는 이미 발굴되었으나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163구의 유해만으로도 해야 할 작업이 많이 남아있다. 아직 위치도 정확하게 파악되지 못한 많은 학살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서는 여양리를 발굴․정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노정된 몇 가지 문제들을 바탕으로 하여, 민간인 특히 보도연맹 관련 학살사건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지를 언급해 두고자 한다.

첫째, 학살된 사람들이 ‘양민’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시기에 학살된 민간인의 유족 가운데에는 결국 이념의 문제를 따져서 우익인데도 국군이나 미군에게 학살된 경우는 양민학살로, 보도연맹관련자 등 좌익성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학살된 경우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분리해서 보는 시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양자 모두 국가의 공권력이 잘못 집행되어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은 틀림이 없다. 사건의 사안을 가려서 분류하는 것은 모르겠으나, 양민은 보호하고 좌익성향으로 분류된 이들은 죽어 마땅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이들 모두가 양민이며 억울한 시대의 희생자가 아니겠는가?

둘째,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관련자의 증언 기록, 문자로 기록된 자료 조사, 유족 확인, 유해 발굴작업 등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가 하나로 모일 때에만 사건 전모가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므로, 어느 하나만이 중시될 수 없다. 따라서 이들 작업이 동시에 진행될 수 있는 어떤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하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실질적으로 작업을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당시의 경험자나 목격자들은 모두 이미 고령이 되었다. 남은 시간이 적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선순위를 정해서 서둘러야만 한다. 유해 발굴에 관한 점은 여양리의 예가 하나의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셋째, 유족들이 유해를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절실한 일이다. 학살된 사람들의 신원이 밝혀 그들이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아는 것은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내용이다. 따라서 다양한 방법으로 신원 확인을 위한 노력이 있어야 되겠지만, 결국 가장 궁극적이고도 확실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DNA분석 작업이다. 많은 시료를 동시에 분석할 수 있는 체제가 갖추어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각각의 유해와 유족을 정리하여 지속적인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보상이나 배상을 먼저 제시하여 유족을 현혹하거나, 엄청난 예산을 들여 단지 위령탑을 세우는 것에 해결의 초점을 맞추는 시각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주장할 것도 역시 아니다.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진상규명이다. 사망자의 불명예와 유족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며, 이와 같은 시대의 억울한 희생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역사 속에서의 교훈이 남아야 한다. 가장을 잃은 가족이 잘 살 수는 없겠으니 그들의 고생이 오죽했으랴만, 몇 푼의 돈으로 모든 문제를 원점으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민간인 학살사건을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의 방향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다시금 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상길 교수(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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