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대, 박재규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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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시아뉴스 칼럼] 김은정 교수
엄마는 부엌을 정말 좋아했을까? –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2017년 09월 07일 (목) 16:16:26 [조회수 : 61] 경남대인터넷신문 knupr@kyungnam.ac.kr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여러 가지로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출간 직후 열광적인 반응이 있었다면 이후 ‘표절 논란’에 휩싸여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화제성’의 문제를 떠나 이 소설은 ‘엄마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이 첫 문장을 대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여러 생각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왜? 어쩌다가? 그리고 ‘일주일’이나 되었다고? 마치 우리 엄마를 잃어버린 것처럼 막막함까지 더해진다.

  칠순의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생일잔치를 하러 서울의 아들 집에 올라왔다가 미처 아버지를 따라 지하철을 타지 못하는 바람에 실종되고 말았다. 당연히 온 가족은 엄마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작품은 그 과정에서 큰딸, 큰아들, 아버지의 기억 속에 있는 엄마의 모습이 모자이크 조각처럼 서술되고, 나중에 ‘새’로 환생한 엄마의 말을 통해 엄마의 전체적인 삶의 모습이 완성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총 네 장과 에필로그로 구성된 이 작품은 1장에서는 큰딸의 회상을 통해, 2장에서는 큰아들의 회상을 통해, 3장은 아버지의 회상을 통해 엄마의 삶이 조명된다. 그리고 4장에서 죽어 ‘새’가 된 엄마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말한다.

  결국 딸, 아들, 남편의 엄마 찾기는 실종된 엄마를 찾는 과정이면서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엄마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인 셈이다. 그런데 그들이 기억하고 찾는 엄마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그러듯이 왜곡된 것이다. 보호자로서 사랑과 희생이 당연시되는 존재, 병을 앓으면서도 가족의 무관심의 대상이 된 존재, 그저 나의 엄마이자 아내로서 필요한 존재, 이것이 그들이 기억하는 엄마이다. 엄마로서, 아내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엄마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각 장의 제목은 이러한 그들의 편협된 인식을 명확히 보여 준다. 1장의 제목은 ‘아무도 모른다’이다. 자녀들을 길러 내느라 온갖 고생을 다한 엄마, 언제나 시골집에 가면 엄마의 모습으로 있는 엄마, 그런 ‘엄마로서’의 모습에 익숙한 가족들은 실종 사건 후 엄마를 찾아 나서면서 ‘객관적’으로 엄마가 어떤 모습이지, 어떤 상태인지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엄마가 글을 모른다는 것, 오래 전에 뇌졸중을 앓았다는 것, 그리고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두통을 달고 사셨다는 것, 이렇게 한 인간으로서의 고통조차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2장의 제목은 ‘미안하다, 형철아’이다. 엄마는 집안의 기둥인 큰아들이 잘 되기만을 소원한다. 그리고 아들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도 언제나 ‘미안하다, 형철아’라고 이야기하는 엄마, 이게 엄마에 대한 큰아들의 기억이다. 우리가 흔히 기대하고 당연시하는 엄마의 모습이기도 하다.

  3장의 제목은 ‘나 왔네!’, 그러니까 남편인 아버지가 본 엄마이다. 결혼은 했으나 가정생활에 관심을 두지 않는 남편, 집을 훌쩍 떠나 돌아다니다가 모든 것이 떨어지면 그제야 돌아와서 한마디 던진다. “나 왔네.” 하고. 언제든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당연한 존재, 아내로서의 엄마이다.

  이렇게 가족에게 엄마는 그저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존재일 뿐이다. 이것은 엄마의 모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엄마는 누구일까? 도대체 엄마는 어떤 존재일까? 그래서 4장의 제목은 ‘또다른 여인’이다. 가족이 아니라 엄마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엄마는 이미 죽어 자유로운 ‘새’가 되어 미처 못다 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엄마가 아니라 ‘박소녀’로서 이야기를 한다.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했다. 엄마에게도 위로와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엄마도 어려서 오빠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슬픔을 느꼈으며, 아버지가 밖으로만 나돌 때 사산을 하고 위로가 필요했던 존재이다. 그래서 죽은 아이를 묻어준 남자 친구 ‘이은규’에게 엄마는 엄마나 아내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엄마의 존재를 잊고 산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이 엄마의 존재는 작품에서 ‘치매’라는 질병을 통해서 전달된다. 치매 환자로서 지하철역에서 길을 잃은 엄마, 그의 의식은 자신의 엄마와 함께한 어린 시절의 시간으로 ‘되돌려감기’를 한다. 새가 된 엄마는 그 순간을 이렇게 말한다.

  지난여름 지하철 서울역에 혼자 남겨졌을 때 내겐 세살 적 일만 기억났네. 모든 것을 잊어버린 나는 걸을 수밖에 없었네. 내가 누구인지도 몰랐으니까. 걷고 또 걸었어. 모든 게 다 뿌옜네. 세살 때 내가 뛰어놀던 그 마당이 선명히 떠올랐네.

  저기, 내가 태어난 어두운 집 마루에 엄마가 앉아있네. 엄마가 얼굴을 들고 나를 보네.(중략) 엄마가 파란 슬리퍼에 움푹 파인 내 발등을 들여다보네. 내 발등은 푹 파인 상처 속으로 뼈가 드러나 보이네. 엄마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지네. 저 얼굴은 내가 죽은 아이를 낳았을 때 장롱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네. 내 새끼. 엄마가 양팔을 벌리네. 엄마가 방금 죽은 아이를 품에 안듯이 나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네. 내 발에서 파란 슬리퍼를 벗기고 나의 두 발을 엄마의 무릎으로 끌어올리네. 엄마는 웃지 않네. 울지도 않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엄마가 치매 상태에서 찾아가는 당신의 본 모습은 엄마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엄마가 필요했던 어린 소녀로서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보통 엄마가 늘 엄마이기만을 기대한다. 그래서 치매에 걸린 엄마가 엄마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어린 시절 당신의 모습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당혹감을 느낀다. 치매에 걸린 당사자 엄마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은 어릴 적 자신이니, 훌쩍 자라 어른이 된 자신의 아들딸을 ‘엄마’나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데도 말이다. 엄마는 누군가의 엄마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딸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자신의 엄마를 엄마로서만 여기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생각에 의문을 가지라고 말한다.

  문득 엄마 생각을 했어. 엄만 그 재래식 부엌에서 평생 대식구의 밥을 짓는 동안 어떤 마음이었을까? 궁금했어. 우리가 또 오죽이나 식탐이 많아? 엄만 그걸 어떻게 매일매일 감당해 냈을까? 엄마가 부엌을 좋아했을 것 같지가 않아. 너는 여동생의 말을 듣고 있다가 무연해졌다. 너는 엄마와 부엌을 따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부엌이었고 부엌은 엄마였다. 엄마가 과연 부엌을 좋아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딸의 입장에서 본 엄마의 모습은 엄마는 부엌이며, 집이다. 그리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엄마는 엄마로만 존재한다. 그것이 아니라고, 다시 생각해 보라고 이 작품은 ‘치매’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말하는 것이다.

  치매는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질병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림으로써 전혀 다른 인격체처럼 행동할 수도 있고, 현재를 잊어버림으로써 과거의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하기도 한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왜곡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작품의 에필로그는 1장과 마찬가지로 큰딸인 ‘너’의 시각에서 서술된다. 엄마가 실종된 지 9개월이 되도록 아직 못 찾은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큰딸인 ‘너’는 로마 바티칸 성당으로 가게 된다. 거기서 엄마가 평소 부탁했던 장미나무 묵주를 사서 들고 성모 마리아 상 앞에 서서 엄마의 따뜻한 손길과 냄새를 진하게 느낀다. 그리고 성모상을 향하여 “(실종된) 엄마를 부탁해요.”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성모 마리아’라는 절대적인 모성의 의미로 해석해 본다면, 그의 기도는 엄마를 지켜줄 ‘또 다른 엄마’에게 바치는 것이다. 이는 ‘엄마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엄마의 존재를 이해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엄마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우리 모두 한번쯤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시간인 것 같다.


<위 글은 디멘시아뉴스 2017년 9월 7일(목)자에 전재한 기사입니다.>

<원문 링크주소>

https://www.dementianews.co.kr/?p=3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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