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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신문 칼럼] 변종현 교수
망우당의 의병활동과 내적 갈등
2017년 08월 07일 (월) 09:00:49 [조회수 : 47] 경남대인터넷신문 knupr@kyungnam.ac.kr

   
  망우당(忘憂堂) 곽재우(1552∼1617)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41세로 의령에서 먼저 의병활동을 전개하였고, 임란 후에는 벼슬에 나아가기보다는 창녕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수양에 힘을 기울이면서 선계(仙界)를 지향하였다.

  망우당은 16세에 남명 조식의 외손녀를 아내로 맞음으로써 남명의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송대 유학자들이 ‘경(敬)’을 중시하였다면 남명은 ‘의(義)’의 중요성을 부각시켰고, 남명의 ‘의(義)’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이가 망우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3세 때 부친이 의주목(義州牧)에 제수되자 아버지를 따라 국경지역인 의주에 살았고, 27세 때는 부친이 사신으로 북경에 들어갈 때에 부친과 함께 북경을 다녀왔는데, 이러한 젊은 시절의 경험이 국방 문제와 국제 관계에 대한 안목을 갖추게 하였던 것 같다.

 

 

  임란시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격퇴시키는 동안, 육지에서는 망우당이 의병을 모아 정암진, 진주성, 화왕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지역간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경상우도를 방어하는데 공을 세워 왜군이 호남으로 진격하는 것을 저지시켰다.

  특히 망우당은 백마를 타고 홍의(紅衣)를 입고 앞장서서 적진을 헤쳐 나갔다고 한다. 특히 망우당에게 따라 다니는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천자께서 내리신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는 호칭은 피아장졸들에게 위엄을 보이면서, 의병들에게는 사기를 진작시키고 적군들에게는 위압감을 주는 효과를 십분 발휘하였다.

  밍우당은 용병술(用兵術)에서도 뛰어났지만 유가의 선비정신을 체득하고 있었고, 병가의 이론에도 깊은 지식을 갖추고 있었기에 전략과 전술을 잘 운용할 수 잇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有召命, 소명이 있어>에는 망우당의 만년의 내적 갈등이 잘 드러나 있다.

  九載休糧絶鼎煙(구재휴량절정연)

  구년 동안 양식 없이 솥에 연기 내지 않았는데

  如何恩命降從天(여하은명강종천)

  어찌하여 은혜로운 명령 하늘로 내려오나?

  安身恐負君臣義(안신공부군신의)

  몸을 편안히 하니 군신의리 저버릴까 염려되는데

  濟世難爲羽化仙(제세난위우화선)

  세상 구제함이 우화등선하기보다 어렵구나

  망우당은 만년에 도교사상에 몰두하면서 1602년부터는 비슬산에 들어가 솔잎을 먹고 곡식을 멀리하면서 신선이 되고자 하였다. 위 시에서도 망우당은 속세를 떠나 벽곡을 하고 있는데, 왕명이 내려와 벼슬을 하라고 하니 내적으로 갈등하고 있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기구에서는 9년 동안이나 솥에 불을 때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양생술(養生術)에 더욱 깊이 몰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벼슬하라는 명령이 내려오니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저버릴까 두렵고, 세상을 구제하는 것이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심적 고충을 드러내고 있다.

<위 글은 경남신문 2017년 8월 7일(월)자 23면에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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