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칼럼] 최동호 석좌교수
[문화일보 칼럼] 최동호 석좌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7.06.26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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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詩의 디지털적 진화와 디카詩


  제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인공지능(AI)의 물결이 생활 현장 여기저기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세계 최강의 바둑 고수들을 모두 격파한 인공지능은 이제 더 이상 상대를 찾지 못하고 바둑계를 떠나, 의료·법률·증권 등의 시장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시가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과연 시의 미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도 제기된다. 그 시적 진화의 가장 민감한 징후가 디카시(詩)의 출현이다. 디지털 문화의 대표적인 특징은 경박단소형(輕薄短小形)이다. 가볍고, 얇고, 짧고, 작은 것들이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가능해진 것이다. 문학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서사시의 시대가 있었고, 장편 대하소설의 시대가 있었다. 모두 국가를 건설하는 영웅시대나 활자 문화를 주도하던 대중 시대를 반영하는 문학의 장르들이다.
 
  디지털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전할수록 문화의 시대적 코드는 달라질 수밖에 없고, 시 또한 새로운 형태로 진화할 수밖에 없다. 한때 우리 시단에서 장형(長形)의 요설적인 시가 유행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 유행이 시대적 방향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 필자는 이와 달리 짧은 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형식의 정립까지 구체화한 것은 아니지만, 시대적 방향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의 절구(絶句), 일본의 하이쿠(俳句), 한국의 시조 등은 각기 그 나라 문화가 만들어낸 짧은 시의 형식들이다. 일본의 하이쿠는 5·7·5 열일곱 음절에, 한국의 시조는 3장 45자 내외에 시적 감정을 축약시키는 시 형식이다. 단형시의 중요성을 강조한 필자는 시조의 길도 아니고 하이쿠의 길도 아닌 새로운 시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고대 신라의 향가에서 가장 짧은 사구체(四句體) 형식도 참조 사항이다.

  어떻든 최근 우리 시단(詩壇)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어서 시조시단에서는 단형(短形)시조가 주목받고 있으며, 현대시에서도 단형시(短形詩)가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장형의 난삽한 시편들 또한 시대에 반응하는 그 나름의 존재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 시가 지닌 특성과 의미 자체를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문화적 코드가 향하는 바는 장형시(長形詩)가 아니라, 극소에서 극대를 지향하는 단형시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디카시가 새로운 화두가 되었다. 조금 생소하지만 최근 일반인들에게는 친숙하게 소통된다. 디카시라는 용어를 최초로 부여한 이상옥 교수의 말처럼 영상 기호를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는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디카시는 일상생활 속에 강한 침투력을 갖고 있다. 오늘날 한국인의 필수품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디카시는 영상 이미지와 짧은 시행으로 양자를 결합시켜 다중의 독자들에게 시적 공감을 전파한다. 이미지 포착은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적이며 짧은 언어적 표현은 시적 어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이다. 첫 디카시집 ‘고성가도’를 낸 이 교수는 ‘디카시창작입문’까지 출간했으며, 다섯 권의 디카시집을 출간한 원로 이상범 시인의 시집 ‘꽃에게 바치다’와 김왕노의 시집 ‘게릴라’, 그리고 김종회 편 ‘디카시의 매혹’ 등이 개척적인 길잡이로 나서고 있다.

  디카시의 특성 중 하나는 시가 오행 내외로 짧다는 점이다. 이는 단형시를 강조한 필자의 논지와 상통한다. 이미 영상 이미지를 눈앞에 제시해 놓았으니 긴말을 하는 것은 사족에 불과하다. 이는 디카시의 언어적 표현 방식의 결정적 요소이기도 하다. 디카시가 앞으로 대중화되리라는 전망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시대적 코드의 하나로 디카시의 중요성이 부각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전통시의 문법을 배제할 수는 없다. 문자적 표현이 주는 공감이 영상 이미지에 비해 취약하다면 디카시는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크다. 새로운 문학에 도전하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그것이 성공적으로 착근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문학적 전통에 뿌리내려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디카시의 대두는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 디지털 기기의 진화에 대응하는 시의 진화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인간에게 디카시가 양방향 소통을 통해 인간 존재의 영역과 문학의 고유성을 지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또한 가능하다. 문학이라는 제도와 관습은 4차 산업혁명과 더불어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될 것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각적 소통을 통해 문학의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더 현실화하면 가장 먼저 없어질 직업군이 의사, 변호사라고 한다. 인공지능 자동차가 상용화하면 거리의 신호등도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종전에 상상만으로 가능하던 세상이 현실로 펼쳐지는 것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이 인공지능 기계와 함께 인간들이 살아가야 하는 변혁의 시대가 몰아쳐 오고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달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불가능한 것이 사라지고 멋지고 신나는 세상이 도래했다고 할 수도 있다.

  인간의 수명은 무제한 연장될 것이다. 한편에서 영생이 가능한 세상을 찬탄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에서 생각하자면 인간은 작고 초라하고 볼품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끔찍한 세상이기도 하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지켜주는 문학의 위의(威儀)가 존중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디카시의 가능성에 희망을 가져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위 글은 문화일보 2017년 6월 23일(금)자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원문링크주소]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7062301033711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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