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신문 칼럼] 변종현 교수
[경남신문 칼럼] 변종현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7.06.08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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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은암(大隱巖)’ 시에 담긴 정치 풍자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은 조선 선조 때 이달, 백광훈 등과 함께 삼당(三唐)시인으로 이름이 났다.

  이들 세 사람은 학당(學唐)을 지향하여 우리 한시를 질적인 면에서 당시(唐詩)의 수준까지 격상시킨 공이 있다. 고죽은 성품이 호방하고 활 쏘는 솜씨와 노래, 거문고와 피리 연주까지 잘하였다고 한다.

  선인들의 평을 보면 고죽은 지나치게 고결(高潔)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당시 처신에 문제가 있었던 이산해를 멀리하여 요직에 뽑히지 못하였고, 허봉도 고죽과 사귀기를 원하였으나 상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조 때에는 북평사로 경성에 가 있을 때 기생 홍랑 (洪郞)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이듬해에 고죽이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자 홍랑은 함흥까지 배웅하면서 묏버들 한 가지를 꺾어 이별의 아쉬움을 시조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기생과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으로 고죽은 여러 번 구설수에 오르게 되고 결국은 파직을 당하였다.

  그가 지은 ‘대은암(大隱巖)’이라는 시는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의 정치적 행적을 풍자하였다.

 


  門前車馬散如烟(문전거마산여연) 문 앞에서 수레와 말 연기처럼 흩어지더니

  相國繁華未百年(상국번화미백년) 정승님의 영화는 백 년도 채 못 가네요.

  村巷寥寥寒食過(촌항료료한식과) 시골 마을 쓸쓸한 채 한식절을 막 넘기니

  茱萸花發古墻邊(수유화발고장변) 수유화만 옛 담가에 환하게 피었구려

  북악산 기슭 삼청동 현재 경기상고 자리에 남곤이 집을 짓고 살면서 ‘대은암(大隱巖)’이란 이름이 생겨났다. 그 당시 시인으로 이름이 났던 박은과 이행이 술을 들고 남곤을 찾아가면 남곤은 밤 늦게 돌아오니 만날 수가 없었다. 박은은 남곤이 살던 집터를 주인에 빗대어 대은암(大隱巖, 크게 숨어있는 바위)이라 하고, 그 밑에 흐르는 여울을 만리뢰(萬里瀨, 만리 밖에 흐르는 여울)라 했다. 기구와 승구에서는 대은암 주변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대비적 시각으로 그려내었다. 남곤이 영의정에 있을 땐 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타고 온 수레와 말들이 연기처럼 흩어지곤 했는데, 정승님의 영화는 백 년도 채 못 갔다는 것이다. 남곤은 심정, 홍경주와 더불어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김정 등을 제거하였고, 사후 30년이 지난 뒤에는 관작이 삭탈되었다.

  전구와 결구에서는 시골마을은 쓸쓸해진 채 한식절을 막 넘기니, 수유화만 옛 담가에 환하게 피어 있다고 하였다. 이 시는 겉으로는 풍경 묘사를 통해 인생무상을 읊은 듯이 보이지만 속으로는 남곤의 정치적 행적을 호되게 질책하고 있다.

<위 글은 경남신문 2017년 6월 8일(목)자 27면에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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