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칼럼] 정일근 교수
[국제신문 칼럼] 정일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7.04.24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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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사랑을 만든다

  오늘 이 '아침숲길'에서 당신에게 시(詩)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계절은 시를 이야기하기 좋은 잎 푸른 4월이고, 잎들은 4월의 끝으로 손바닥을 활짝 펼치며 걸어가고 있습니다. 시는 언제부터인가 몇 푼 재화 가치마저 될 수 없는 '시시'한 것이 돼 버렸습니다. 하지만 빛나는 존재로 믿는 신도들에게 시는 사막을 건너가는 '비상지도'입니다. 저에게 시는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영혼에게 푸른 오아시스를 안내하는 등대거나, 미로처럼 꼬이고 꼬인 현실의 골목을 벗어나게 하는 내비게이션입니다.

  시는 누구에게나 평등합니다. 고루고루 평등하기에 시는 누구에게나 한 번씩은 운명처럼 찾아옵니다. 쿵쿵쿵쿵, 시가 사람의 심장을 처음 두드리며 인사하는 순간, 그 순간에 시를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시가 사람의 꽃으로 활짝 피거나 피지도 못한 채 그늘 깊은 곳으로 흔적 없이 지곤 합니다. 그렇다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지는 마십시오. 시 다음의 시는 평등하지 못합니다. 자신에게 권하며 내미는 의자에만 앉습니다.
 
  시가 찾아오는 순간을 가장 시적으로, 가장 멋있게 말한 시인이 '파블로 네루다'입니다. '밤의 가지에서,/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격렬한 불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건드리더군'. 네루다의 예언이 값지고 복된 것은 그 순간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에게 시의 시작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시 창작 강의를 듣는 새내기 대학생이 어디선가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읽고 손글씨로 필사해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를 아느냐며, 자랑처럼 어깨를 으쓱거릴 때, 얼굴 가득 시가 찾아와서 환희로 빛나는 모습은 제가 시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오르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매몰차게 권했습니다. 시를 사랑하기 위해 사랑에 대해 분노하는 법부터 배우라고.

  저에게 생물학적인 고향은 진해지만, 제 시의 고향은 마산입니다. 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나 마산회원구가 아닌, 그냥 그대로의 마산입니다. 밍밍하지 않고 날것처럼 퍼덕이는 바다를 가졌습니다. 백석의 시에서 '구마산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곳이라 한 그 마산입니다.

  그래서 마산은 제 시의 '원적(原籍)'입니다. 마산에는 250년이 된 오래된 골목을 가진 '창동'이 있습니다. 지난 3월, 그 골목 어딘가에 '3·15나무'를 만든다고 열매처럼 달 메시지 부탁을 받았습니다. 저는 '분노가 사랑을 만든다'는 즉답을 보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분노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마산이 저에게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마산을, 시를 사랑하기 위해 분노하라고. 사랑하기 위해서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고.

  자연의 색인 천연염색을 배우면서 물든다는 뜻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알았습니다. 물들기 위해 스스로 소색(素色)이 되어야 합니다. 소색은 자신을 다 버린 가장 겸허하고 가장 남루한 색입니다. 그런 색이 언제든 '공즉시색(空卽是色)'이 될 수 있으며, 미련 없이 '색즉시공(色卽是空)'으로 돌아갑니다. 어쭙잖은 형광기가 남은 색으로는 어떤 색이든 완벽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받아들이지 못할 때 색은 결코 색즉시공의 공으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찌꺼기일 뿐입니다. 분노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가장 완벽한 소색입니다.


  마산의 색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덕지덕지한 '때'인 자신의 색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시를 배우고 쓰면서 알았습니다. 마산은 그때 시가 찾아온 스무 살의 저에게 가르쳤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깊이 분노하는 법을 먼저 배우라고. '마산의 삼월'은, '마산의 시월'은 저에게 정당한 분노를 가르쳤습니다. 분노는 사랑의 방식이니 침묵하거나 타협하지 말라고.

  현실에 분노하지 못하는 청춘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달고 있는 초록이 플라스틱 조화 잎 같습니다. 분노 속에서 진정한 사랑의 꽃이 핍니다. 가장 향기로운 꽃이 핍니다. 분노는 절망을 이기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청춘들에게 물려주려는 이 시대는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사막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위해서 분노로 사막에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나무가 자라 숲이 되게 하는 힘, 분노에서 시작됩니다.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쿠부치 사막은 우리나라 황사 피해의 발원지입니다. 그 사막에 중국과 한국의 청년들이 나무를 심은 지 오래입니다. 황사를 방치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사막에 나무를 심는 손이 지금은 분노하는 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손이 분노한 만큼 미래엔 사랑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4월이 가면 5월이 옵니다. 5월에 마음껏 사랑하기 위해서 4월에 분노해야 합니다. 분노의 힘이 비틀어진 수레바퀴를 바로 굴러가게 합니다. 외면하거니 침묵한다면 그건 결코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분노하는 시가 가장 위대한 서정시일 수밖에 없는 까닭 또한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마산의 삼월이, 마산의 시월이 분노를 가르쳤기에 지금 마산에서 하는 이 사랑이 뜨거울 수밖에 없다고!

<위 글은 국제신문 2017년 4월 22일(토)자 19면에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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