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학 테니스부, 1971년 창단해 전국체전 우승까지
우리 대학 테니스부, 1971년 창단해 전국체전 우승까지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7.03.10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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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회 전국체전에서 강호 성균관대 꺾고 우승한 이후 테니스 명문대학으로 도약

1971년 제52회 전국체육대회 우승 기념촬영
양해식(체육교육과 4회), 장병식(체육교육과 1회), 서성한(감독/체육교육과 교수), 정범모(체육교육과 2회)
뒷줄 왼쪽부터
양재곤(체육교육과 3회), 황장연(체육교육과 2회) -앞줄 왼쪽부터
 

  - 글 : 장병식(체육교육과 1기, 전 국가대표 감독)

  우리 나라에 테니스 경기가 시작된 것은 1900년부터이다. 1908년 탁지부(재경부) 관리들이 친목 도모를 위해 회동 구락부를 조직한 뒤에 미창동에 테니스 코트를 마련하여 테니스를 치기 시작한 것이 우리 나라 테니스 경기의 시초였다. 

  테니스는 국내에 도입된 이래 연식정구, 경식정구 등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여가활동을 즐기는 운동이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테니스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우리 나라도 경제발전으로 삶의 질이 나아지면서 TV를 통한 수준 높은 테니스 경기 중계방송 덕에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일부 테니스 용구의 국산화와 더불어 테니스 인구가 늘어나고 경기기술이 향상되어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우리 대학(당시 마산대학)의 테니스부는 1971년 창단되었다. 박재규 총장님(당시 경남학원 이사장 직무대리)의 지원 아래 학생과장 이정수 교수(현 일어교육과 명예교수)와 이충훈 교수(현 체육교육과 명예교수)가 실무를 담당하면서 테니스부가 태동되었다. 우리 대학에 1970년 체육교육과가 개설되고, 이후 테니스부가 창단된 것은 경희대학교 부총장이셨던 김명복 박사님의 지원이 지대했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이때 우리 대학이 완월동 구 캠퍼스에서 오늘의 월영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관내 최고의 대학으로 발돋움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당시 대학가에는 연세대, 성균관대, 건국대, 동국대, 중앙대, 단국대가 이미 테니스부를 창단하여 활동 중이었고 영남대, 경북대, 공주사대, 부산대 등 전국의 많은 국공립대학과 사립대학에서 테니스부가 창단되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 민관식 문교부장관(1971-1974년 재임)은 세계적인 테니스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전국 각 대학의 체육실무자들과 중ㆍ고교 교사들이 테니스 강습을 받을 수 있도록 하여 테니스의 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추세에 따라 우리 대학도 테니스부를 창단하였지만 선수 선발, 지원 등 여러 가지 조건과 상황이 어려웠다. 그러나 이런 여건 속에서도 열정 하나만큼은 대단하였다.

  박재규 총장은 창단 첫 해 일본 방문 길에 구입한 테니스 라켓 6자루를 선수들에게 선물해 주셨다. 이 라켓이 선수들 손에 들어오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박 총장은 야마구치시에서 선수들을 위해 라켓을 구입하고, 오사카로 이동하기 위해 역에 도착하여 대합실에서 환송 나온 교민들과 환담을 나누다 신칸센(일본 특급열차)에 탑승했는데, 열차가 출발한 후 라켓을 대합실에 두고 온 것을 발견하였다. 일본 역무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라켓을 찾을 방도를 부탁하자, 다행히 역무원이 친절하게 야마구치 역으로 연락하여 라켓을 찾아 다음 신칸센으로 오사카역에서 받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한국에 돌아와서도 통관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만 해도 테니스 라켓은 국내 반입이 금지되어서 선수용으로 사용한다는 문교부장관(민관식)의 확인서를 제출하고 나서야 선수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라켓을 선물 받은 선수들은 용기백배하여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훈련에 매진하였다. 1971년 10월 13일 제52회 전국체전 대학부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테니스 불모지에서 연마한 신생팀인 우리 대학이 강호 성균관대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였고, 테니스의 명문대학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우승트로피를 들고 선수들이 부둥켜 안으면서 흘린 기쁨의 눈물과 감격의 환호는 아련한 추억의 명장면이었다. 연이어 전국대학선수권 대회에서 단식ㆍ복식ㆍ단체전 등에서 준우승, 우승을 함으로써 테니스의 명문대학으로서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창단 당시 주장과 선수로는 장병식(체육교육과 1회), 정범모, 황장연, 최성근(이상 2회) 선수들이 우승의 주역들이었고, 양재곤(3회), 양해식(4회) 선수들도 우승을 거듭하면서 그 맥을 이어나갔다. 테니스부가 파죽지세로 전국대학가를 호령하던 70년대 초기에 배드민턴부가 창단되었고, 배드민턴 역시 전국 제패를 이어가면서 학교의 명예를 더욱 빛냈다.

  우리 대학의 스포츠 역사는 사막에서 꽃을 피운 것과 같다.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가 있었고, 이를 따라 땀 흘리면서 혼신의 힘을 다한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 대학의 개척기이자 중흥기 시절, 전통의 씨름과 현대 스포츠인 테니스와 배드민턴, 그리고 여자조정 분야에서의 발군의 실력은 대학 사회에서 모교의 위상을 한층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영광이 있기까지는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교수님과 직원분들, 고 김명복 박사님, 정자봉 교수님, 정충견 교수님, 이순복 전 총장님, 이중량 실장님 그리고 의사테니스클럽의 후원이 큰 힘이 되었다. 특히, 이정수 명예교수님과 이충훈 명예교수님의 노고가 이러한 결과를 꽃 피우게 했다.

 

  

1971년 제52회 전국체전 준결승 보도(경향신문 1971.10.12.자)
(경남 마산 3-1 경북 영남, 197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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