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칼럼] 최동호 석좌교수
[문화일보 칼럼] 최동호 석좌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7.03.0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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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시마, 빛의 간이역

  어둠 속에 빛이 있었다. 빛은 어둠의 바구니에서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인간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는 성경의 말씀은 천지창조를 신의 섭리로 풀이하겠지만, 어둠 속에서 빛이 탄생했고 그 빛을 받아 생명체가, 그리고 인류가 탄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빛의 경이로움을 체험하기는 쉽지 않다. 어둠 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자연의 빛은 경이로운 신의 계시이기도 하다는 느낌을 안도 다다오(安藤忠雄)가 건축한 일본의 한 미술관에서 받았다.

  처음부터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조약돌에 깔린 밝고 환한 늦겨울의 빛을 밟으면서 나오시마(直島)의 ‘지중해 미술관’ 입구의 콘크리트 벽면이 서 있는 오솔길을 걸어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경배하듯 서 있는 우리 앞에 어둠 속에 걸린 클로드 모네의 ‘수련’은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세로가 사람 키 두 배 정도, 가로가 세 배 정도인 대형 그림이 빛 속에서 희미하게 그리고 점차 분명하게 우리의 정면에 우뚝하게 서 있었다. 서서히 그 그림이 자연의 빛 속에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수련이 자연의 모습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어둠 속으로 흘러드는 두 줄기의 빛이 그림의 전면을 어둠 속에서 드러내는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필자는 프랑스 파리 근교에 있는 모네의 집에서도 그림만이 아니라 자연 상태의 수련을 보았고 미국의 뉴욕 현대미술관에서도 모네의 수련을 보았지만, 이렇게 색다른 아름다움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어둠 속의 빛이 만들어내는 이 아름다움은 실물의 아름다움과 다른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그것은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고 한참 바라봐야 감지되는 빛의 마술적 아름다움이었다.

  다음 전시장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은 제임스 터렐의 ‘오픈 스카이’였다. 가이드가 바로 앞의 거대한 장방형의 하늘을 바라보라고 했다. 그 지시에 따라 우리는 앞으로 걸어갔다. 마치 허방에 빠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지만, 우리는 분명히 빛의 경계를 넘어서서 또 다른 세상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시 뒤돌아서서 걸어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경계 너머의 세계를 체험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빛이 불러일으킨 일종의 환각 작용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떻든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가 되어 스스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 같은 체험을 했던 것이다. 살아 있는 미술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자기 스스로 던져 보게 하는 체험이었다.

  세 번째 전시장은 이집트나 인도의 신전 같은 월트 드 마리아의 건축적 조형물이었다. 여러 개의 기둥이 서 있고 중앙에 놓인 커다란 원형의 검은 돌은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을 시시각각으로 거울처럼 반영해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윤동주가 우물 속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하늘과 바람과 별을 노래했듯이, 실내에 있는 우리는 외부의 자연 풍경을 사실적으로 바라보면서 자연의 외관이 아니라 우주적 자아를 생각하게 되었다.

  밖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실내에 배치된 검은 돌을 통해 우리는 자연을 자연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자연이 그리고 우주에서 쏟아지는 빛과 소통하는 순간 경외감이 일었다. 올라가는 계단에도 빛이 비치고 있었고 실내의 모서리에도 빛이 비치고 있었다. 인공의 조명이라면 결코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자연의 빛이 실시간으로 우리를 비추고 있다고 느낄 때 차단된 인공의 공간이 아니라, 외부의 자연이 들어와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빛으로 바뀌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핵심은 쉬지 않고 변하는 빛의 질감이며 그 빛의 질감으로 인해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유한하지만 아름다운 빛의 순간으로 자신의 존재를 격상시키는 것이다. 자연의 빛 속에서 유한한 인간의 영역을 초월하여 무한한 빛의 세계로 승화하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을 지복(至福)의 순간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빛을 경험하는 순간은 아주 짧다. 우리의 생은 잠시 그 찰나 빛의 간이역에 머물렀다가 가는 것이다.

  몇 개의 그림에서 받았던 압도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 우리는 자갈돌의 자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커다란 벽면을 빠져나와 나오시마의 상징적인 조형물인 ‘노란 호박’이 있는 해변을 걸었다. 일상의 해변 풍경을 다시 보게 되었지만, 전과는 무언가 다른 세상이 되었다. 많은 미술품에 압도된 것은 아니다. 세 사람의 작품뿐이었지만 우리는 상상력이 하늘로 열리는, 다른 미술관에서 하지 못한 경험을 한 것이다. 땅속에 묻힌 지하의 미술관은 인간 자신의 내면의 길을 열어 주었다.

  미술관은 어둠 속의 빛으로 살아 있었다. 사시사철 변하는 자연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한번 여기에 왔던 사람은 다시 여기에 오게 된다고 한다. 미술관은 우리에게 다시 오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빛의 마술을 극대화시켜 우리가 늘 경험하지만,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물들을 다시 자각하게 하고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게 할 뿐이다. 우리가 잠시 빛의 간이역에 머물다 가는 존재라는 것을 넌지시 깨우쳐 주는 것처럼 말이다.

  빛의 간이역에 머물렀던 순간의 여운은 길었다. 지금도 모네의 ‘수련’이, 터렐의 하늘과 마리아의 돌이 우리의 내면을 비추고 있는 것 같다. 이 여운을 가지고 세상의 빛이 소생하는 봄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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