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조반정 후 반정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체포된 인물로 유몽인(柳夢寅)이 있다. 그는 상부사(孀婦詞, 과부의 노래)로 자신의 심경을 나타냈다.
七十老孀婦(칠십노상부)
일흔된 늙은 과부가
單居守空崑(단거수공곤)
홀로 빈 방을 지키고 있네
慣讀女史詩(관독여사시)
여사시도 익히 읽었고
頗知姙姒訓(초지임사훈)
어진 여성들의 교훈도 알고 있다네
傍人勸之嫁(방인권지가)
옆 사람이 시집가기를 권하면서
善男顔如槿(선남안여근)
남자의 얼굴이 무궁화 꽃 같다지만
白首作春容(백수작춘용)
흰 머리에 젊은 얼굴 꾸민다면
寧不愧脂紛(영불괴지분)
어찌 연지분이 부끄럽지 않으리
이 시에서 시인은 광해군이 실각했다고 해도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뜻을 뚜렷이 드러냈다. 그는 처형됐고, 광해군을 위해 절의를 지킨 유일한 신하라는 평을 받았다. 수련에서는 자신의 처지를 혼자 빈방을 지키고 있는 과부와 같다고 했다. 함련에서는 여사(女史)의 시도 외우고, 어진 여성들의 가르침도 알고 있다고 했다. 여사(女史)의 시는 절개에 관한 시이고, 임(妊)은 문왕의 어머니, 사(?)는 무왕의 어머니로, 두 분 다 어진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경련에서는 옆 사람이 시집가기를 권하면서 남자의 얼굴이 무궁화 꽃 같다고 한다. 여기서 다시 시집가는 것은 인조에게 다시금 충성하라고 권고하는 말이다. 그러나 미련에서는 흰 머리에 젊은 얼굴로 꾸민다면 연지분이 부끄럽다고 하여, 자신은 시집갈 뜻이 전혀 없다고 했다. 광해군 때의 실정을 비판한 유몽인은 광해군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조선 후기 정조는 그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해 신원시켜 줬고,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내려줬다.
<위 글은 경남신문 2017년 1월 24일 (화) 22면에 전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