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도민일보 칼럼] 안차수 교수
[경남도민일보 칼럼] 안차수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6.12.0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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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과 정치적 상상력

  6주 동안 혁명적으로 진화한 시민행동…스스로 빛 되어 직접민주주의 실현으로
 

  "아빠가 업어줄게, 오늘 힘들었지?" "괜찮아요. 좋았어요." "아빠가 오늘 널 데리고 간 것은 너도 커서 혹시 오늘처럼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가만히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야." 듣는 순간 코끝이 시려왔다. 집회가 끝난 서울 광화문 광장을 하염없이 빠져나와 마지막 지하철을 내려 계단을 오르며 듣게 된 아빠와 꼬마의 대화다. 이 대화는 자체로 아름답거니와 나아가 촛불을 바라보는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이다. 6차 촛불집회가 사상최대 230만 명을 넘었다. 6주 동안 641만 명, 촛불은 바람에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 활활 타올랐다. 가족단위의 참여, 중·고등학생들의 자유발언, 춤추고 노래하는 행사, 연행자 없는 비폭력,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거리. 우리는 전에 없던 시위의 규모와 행동 양식에서 스스로 놀라고 있다.

  기록적인 인파와 칭찬받는 시위문화에도 우리는 여전히 촛불집회의 결과를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미증유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한 치를 내다볼 수 없는 정국 상황은 국민으로 하여금 눈을 뜨면 뉴스를 소비하게 했고, 틈만 나면 SNS를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대통령이 3차 담화를 통해 국회를 싸움박질 시켜 탄핵을 피하고 개헌을 유도하는 마지막 카드를 던지자 촛불은 이제 서서히 여의도로 향하고 있다. 몸통은 여당이며 여당의 해체만이 이 사태를 매듭지을 것이란 집단지성의 움직임은 누구에 의해 제시된 것이 아니라 공론장이 도출한 결론이자 행동강령이다. 예지력의 알파고처럼 정치적 상상력의 촛불민중은 6주 동안 혁명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촛불의 정치적 상상력을 확인한 순간은 평화시위 대 폭력시위의 갈등이다. 3차 100만 집회에도 달라진 것이 없는 권력의 태도에 촛불은 흔들렸다. 촛불시위는 축제, 놀이, 가족 나들이 등으로 치부되었고, 1000만 명이 모여도 평화시위로는 목적을 이루기 힘들 것이란 비판에 직면했다. 보수언론과 구정치의 칭찬은 분노를 가두는 함정이라며 폭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4차 촛불은 흔들림 없었다. 충돌의 기미가 보이면 촛불은 비폭력을 외쳤고, 의경들에게 우산과 장미가 전해졌다. 경찰과 얼굴을 맞댄 꼬마들, 학생들, 일반인의 두려움 없는 대통령 퇴진 함성이 폭력에 의한 저지선 돌파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시민의 자유롭고 합리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다. 장수풍뎅이연구회, 고산병연구회, 범야옹연대 등 광장에 새롭게 등장한 깃발을 보라. 수많은 가상단체와 비정치적 모임의 깃발이 기성 노조, 정당의 깃발을 넘어 광장을 압도하고 있다. 손에 들린 각양각색의 피켓과 문구를 보자면 촛불은 이미 새로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거대하고 대담한 정치적 상상력이다.

  대통령, 국회, 법원이 기능을 상실하고 헌법과 국민을 유린하자, 촛불은 스스로 빛이 되어 구체제의 어둠을 몰아내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 대통령과 국회가 개헌을 말하지만 촛불은 이미 권력분점 나아가 모두에 의한 직접민주주의라는 새로운 헌법정신과 정치체제를 제시하고 있다. 촛불은 결과를 떠나 민주주의를 다시 배우고, 새롭게 정의하며, 함께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이미 시민혁명이라는 역에 진입하고 있다.

<위 글은 경남도민일보 2016년 12월 5일(월)자 11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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