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도민일보 칼럼] 이재성 시인
[경남도민일보 칼럼] 이재성 시인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6.11.11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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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무 속에서

  짙은 해무 속을 항해한다. 망망대해지만 갑갑하게 갇힌 기분이다. 레이더스코프가 돌아가지만 접촉되는 물표는 없다. 모든 것이 오리무중이다. 손을 뻗으면 사라지는 손바닥.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바다 앞에서 들려오는 일등항해사의 호각소리. 상하좌우 분별이 되지 않는다.

  해무에 번진 항해등을 바라본다. 조업은 계속되었다. 그물을 당기는 손조차 보이지 않는다. 바다안개가 지워나간 손을 찾기 위해 더욱 빠르게 내 손을 움직여야 했다. 이런 날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바다안개 속에서 자꾸만 귓속에 경종이 울린다.

  2016년 11월 9일 경남대에서는 자발적으로 서명운동을 한 1182명 대학생들의 시국선언이 있었다. 바로 10·18광장에서 순진한 학생들의 시국선언이 있었다. 이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아니, 사실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진실 앞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당사자들. 의혹과 의문에 가려진 진실을 알아야 하지만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지금 대한민국은 해무 속에 갇혔다.

  무적을 울리는 등대를 찾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있다. 선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잠시 엔진을 꺼야 했다. 하지만 뭍에서 걸려온 선주의 전화기는 지속적인 조업을 요구했다. 이번 주 조업량 미달이다. 다시 조업은 계속되었다. 점점 짙어지는 해무에 진실이 묻혀가고 있다. 선원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왜 계속 조업을 해야 하는지를. 이들의 생과 사의 경계가 아슬아슬하다.

  그때다. 일등항해사의 호각소리가 다급하다. 그물을 끌어당기는 파워롤러에서 곡성이 들린다. 주인 잃은 빨간 고무장갑이 보인다. 바다안개 속에서는 오직 목소리만 살아 있다. 스톱, 스톱을 외치는 선원들을 향해 달려갔다.

  시국선언 피켓을 든 여학생이 말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시국선언 피켓을 든 남학생이 말한다.

  "경남대 학우 여러분, 지금은 분노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전국에서 불 밝히는 촛불 집회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촛불 하나하나가 모이기 시작한다. 커다란 등불이 된다. 우리가 내는 목소리가 짙은 해무를 알리는 무적이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목소리를 내는 일이다. 더 이상 팔짱끼고 거리를 두면 안 된다. 드라마인 줄만 알았지만 우리들의 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머리에서부터 소름이 돋는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한다. 오늘의 잘못을 내일까지 가져가서는 안 된다.

  찬바람 불어오는 11월.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 거리로 나온 국민이 많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해무 속에서, 밝혀지지 않은 안개 속에서 하늘 위로 촛불을 밝히고 있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들이 보인다.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있다. 혹은 침묵을 지키고 버티고 있는 나뭇잎도 있다. 지금 모든 국민이 마지막으로 남은 잎사귀들을 쳐다보고 있다. 안개 속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도 떨어지는 잎사귀를 막을 순 없을 것이다.

  선장이 엔진을 정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시끄럽던 바다가 조용해진다. 해무가 짓누른 바다는 아직 수평이다. 점점 옅어지는 바다안개 속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보았다. 목소리를 들었다. 살아 있는 바다를 되찾으려면 짙은 해무를 걷어내야 한다. 살아 있는 대한민국을 되찾으려면 아직 많은 목소리들이 필요하다.

<위 글은 경남도민일보 2016년 11월 11일 (금) 10면에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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