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도민일보 칼럼] 안차수 교수
[경남도민일보 칼럼] 안차수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6.10.2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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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공룡, 가을야구의 메시지

  규율·성실·명예 존중하는 야구의 미덕…가치 실종된 한국 정치판서 더 돋보여

  "또 레슬링 봤어?" "네, 할머니가요…"

  애들이 어렸을 때 할머니가 집으로 오시면 주로 보던 채널은 드라마, 가요, 안방 토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레슬링은 의외였다. 존 시나를 비롯, 랜디 오턴, 트리플H… 애들이나 알 법한 이름을 줄줄이 아시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사실 난감했다. 폭력과 반칙이 난무하는 프로 레슬링을 애와 할머니가 함께 즐기는 상황을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어 '짜고 치는 고스톱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대답을 피하셨지만 서운한 마음은 짐작이 갔다. 돌이켜 보면 애들을 돌보느라 힘든 시절, 할머니와 손자가 함께하는 즐거움을 뺏은 것 같아 죄송스럽다. 김일 선수의 박치기 시대를 살아온 세대에게 프로 레슬링은 정의의 스포츠다. 무지막지한 상대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 허용된 규칙을 준수하고 반칙하지 않는 준법, 동료를 위해 몸을 던지는 의로움의 싸움극이다. 관객은 불리한 약자를 응원하고, 악당을 미워하며, 불의한 승리에 저주를 퍼붓는다. 짜고 치는 연출인 줄 알면서도, 보고, 흥분하고, 몰입하는 참여극이자 공공의식(ritual)인 셈이다.

  우리 지역의 프로야구팀이 가을을 달구고 있다. 1차전 9회말 역전승에 이어 2차전 박빙 승리로 모처럼 지역사회가 기대감으로 들썩이고 있다. 현대 프로 스포츠가 오락 산업화되고 자본과 정치의 부속물이 되면서 우리의 의식을 마비시켜 체제유지에 이바지한다는 비판에도 야구의 미덕은 존재한다. 각본 없는 드라마, 상대에 대한 존중, 엄격한 규율, 성실한 태도 등 역사와 전통의 스포츠가 가진 미덕은 풍부하다. 특히 명예를 중시하고 공동체를 강화시키는 가치는 훌륭하다. 미덕과 가치가 실종된 한국 정치를 생각하면 야구는 더욱 돋보인다.

  돈과 권력 그리고 문화가 서울에 집중되어 껍데기만 남은 지역에서 야구는 지방 분권의 상징이다. 한국시리즈에서 광주나 대구가 지난 시대를 풍미했던 점을 생각하면 분권의 모범사례로 부르고 싶다. 지역이 이토록 공평하게 상호 존중하고 경쟁하는 시스템을 다른 분야에서는 찾기가 어렵다. 최근 불거졌던 도박에 휩싸인 선수들에 대한 강력한 제재, 승부조작 연루자 퇴출 등 원칙을 지켜가는 태도는 법치와 집단 윤리의 전형이다. 선수는 유명하고 비싸다고 자리가 보장되지 않으며 매일 성실과 실력으로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공정한 세계다. 대졸, 고졸, 연습생 등 출신에 의한 금수저나 흙수저도 없고 무용지물이다. 감독 역시 책임의 자리이지 군림의 자리가 아니다. 언제든 경질되거나 스스로 물러난다.

  프로야구는 전두환 쿠데타정권의 우민정책의 일환으로 탄생했다. 정치적 불만을 야구장에서 잊으라는 것이다. 35년이 지난 지금, 야구는 발전을 거듭한 반면 정치는 불만의 시절로 되돌아갔다. 야구의 인기가 단순히 이기고 지는 승부에 있다고 판단한다면 오산이다. 공정함과 명예, 그리고 공동체주의의 미덕을 만들기 위한 노력에서 찾아야 한다. 현재 우리의 정치처럼 특권과 반칙으로 결과가 뻔한 경기는 재미도 없고 레슬링의 악당처럼 분노의 대상일 뿐이다. 공룡군단이 창단 5년 만에 한국시리즈를 넘볼 수 있다는 것, 야구에서는 가능하다.

  정치, 야구에서 배워라.

<위 글은 경남도민일보 2016년 10월 24일(월)자 11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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