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칼럼] 최동호 석좌교수
[세계일보 칼럼] 최동호 석좌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6.08.01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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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사람들의 한국시 사랑

  두 번째 한국시 낭독회도 성황

  청중들은 모두 러시아인 이채

  한국어 강좌 개설 때도 큰 인기

  러시아 저력은 문화·인간사랑

 

  모스크바에서의 두 번째 한국시 시낭독회를 얼마 전 모스크바 국립외국문학도서관에서 가졌다. 방학 중이라 청중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에도 200여 명이 모여들었다. 모두 러시아인이라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교민이나 학생이 아니라 한국에 대해 또는 한국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진 청중이 모여 높은 집중력을 보이며 끝까지 시낭송을 경청했다. 비로소 한국문학이 러시아인의 눈과 귀를 열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근배 시인은 문학 청년시절 광복의 격동기에 오장환의 번역으로 읽었던 에세닌 시집에 대한 소감을 피력하고 ‘랴잔 마을의 시’라는 에세닌에게 헌정하는 시를 읽었다. 청중의 뜨거운 관심은 낭독 후 독자와의 대화에서 쏟아졌다. 모국의 시인의 시에 먼 나라의 시인이 그렇게 크게 감명을 받았다는 것이 그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문정희 시인은 ‘남자를 위하여’를 통해 여성 청중에게 강한 호응을 받았다. 강약을 조절하는 절제된 시낭독법도 그들에게 공감을 주는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불꽃 비단벌레’를 읽고 스마트폰으로 이를 작곡한 노래를 들려 주었다. 새로운 방법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행사에서 주목할 것은 러시아 성우와 연극배우가 번역시를 읽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낭독법은 매우 차갑게 객관적으로 시를 읽는다는 점이었다. 낭독자가 시를 뜨겁지 않게 최대한 객관성을 가지고 시의 메시지가 청중에게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읽는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낭독회가 끝나고 나의 시를 읽은 러시아 여성 배우가 제대로 잘 읽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줄 때 그들이 번역시를 나름대로 열심히 읽고 준비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요즘 모스크바에서 한국어 강좌를 개설하면 3000명 정도의 수강생이 몰려든다고 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도 이에 못지않게 강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고 할 것이다. 러시아인은 외모는 서구적이지만 그들의 심성은 동양적이다. 어쩌면 그들이 한국에 대해 깊은 정서적 유대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근대문학 초기에 우리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서구문학이 밀려들기 전에 러시아 문학을 먼저 읽고 세계문학을 호흡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푸슈킨이나 투르게네프의 나라이다. 푸슈킨의 시 일부는 방방 곳곳의 이발소에 그림과 함께 붙어 있었던 국민적 명시였으며,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는 윤동주의 시 ‘투르게네프의 언덕’ 등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시낭독회를 마친 다음날 모스크바극장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관람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직업의 고하를 불문하고 1000명이 넘는 청중이 숨죽이며 발레를 감상하는 현장을 보고 그들이 진정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국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러시아인들에게도 디지털 문화가 새롭게 영향을 주어 독서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도 들려왔다. 그럼에도 그들의 저력은 문화에 대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에서 우러나오며 그것이 바로 러시아의 원동력일 것이다. 러시아의 공원이나 극장, 그리고 거리의 곳곳에서 어린아이들과 함께 즐기고 있는 사람을 보며 아직도 그들의 미래가 밝게 보였다. 인간성의 말살로 무차별 살인이 벌어지며 자살과 마약이 난무하는 카오스적 혼돈에서 러시아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문화 예술을 즐기는 것이 놀라웠다. 결국 우리가 러시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문화와 예술을 매개로 할 때 성공적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최근 크게 요동치는 동아시아의 국제적 질서를 바라볼 때 한국과 러시아의 연관성은 결코 배제할 수 없다. 러시아는 멀리 있는 나라가 아니며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으로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펼쳐 나갈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위 글은 세계일보 2016년 8월 1일(월)자 30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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