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일보 칼럼] 정일근 교수
[경상일보 칼럼] 정일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6.05.20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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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에게 푸른색을 되돌려주자

  꿈으로 가득차 밝게 빛나야 할 청년들

  우울한 시대 상황에 제 빛을 잃고 살아

  용기·열정 선물해 푸른빛 찾아주고파

 

  흔히 하늘이나 바다를 비유해 쓰는 ‘쪽빛’에서 ‘쪽’은 색깔의 이름이 아닙니다. 쪽은 식물의 이름입니다. 붉은 색깔을 뜻하는 ‘꼭두서니 빛깔’ 역시 ‘꼭두서니’라는 식물의 이름입니다. 둘 다 푸른 잎을 가진 초본(草本)입니다. 그것들의 몸에서 파랑과 빨강 같은 색이 나오는 것을 누가 어떻게 알았을까요? 요즘 자연염색으로 망중한을 보내며 오늘까지 전해지는 선인의 지혜가 신기하고, 고마울 뿐입니다.

  쪽은 마디풀과에 속하는 일년생 초본식물입니다. 쪽을 채취해 발효시켜 쪽물을 들이는 것을 ‘남염(藍染)’이라 합니다. 남염은 이집트에서 삼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 해에 ‘대청’이란 쪽 농사를 도운 적이 있었습니다. 유채꽃처럼 노란 꽃이 피는 것이 별로 독특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관심을 두지 않으면 봄에 만나는 흔한 식물이었습니다.

  쪽빛을 우리 종이인 한지에 물들이면 감지(紺紙)가 됩니다. 감지는 향균성과 보존성이 강해 천년을 견딥니다. 그래서 ‘비단 오백 년, 종이 천년’이란 말이 전합니다.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물757호인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46’이 있습니다. 이 보물의 감지가 쪽물 들인 종이입니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정확한 기록이 없어 만들어진 연대를 알 수 없지만 종이의 질이나 그림과 글씨의 솜씨 등으로 미루어 14세기에 만들어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금니(金泥)는 금가루로 썼다는 것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감색은 야청빛으로, 검은빛을 띤 푸른빛입니다. 그 위에 금가루로 기록한 ‘부처의 가르침’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감동을! 감지에 역사가 기록됐다면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청사(靑史)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습니다만.

  쪽빛과 저의 인연은 스무 해 전 통도사에서였습니다. 마음까지 단숨에 물들이는 파란빛이 저를 첫눈에 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빛깔은 우리가 잊고 사는 하늘과 바다의 원색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쪽빛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쪽빛도 하늘과 바다를 통해 늘 만나는 색이어서 우리가 무심한지 모르겠습니다.

  스무 해 전 30대에는 그 빛깔의 아름다움에만 매료되었습니다. 요즘은 쪽빛 염색을 하면서 물이 드는 과정과 결과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염색을 우리말로 풀면 ‘색깔을 물들임’입니다. 하얀 한산세모시에 쪽빛을 물들일 때는 굉장히 조심스러워집니다. 소재가 귀한 탓도 있지만 제가 물들이는 과정을 통해 천의 색깔이 운명적으로 결정, 그 색깔에 대한 책임 또한 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물들 수 있고, 물들일 수 있습니다. 그건 영향을 끼치고, 영향을 받는 일입니다. 멘토와 멘티의 관계일 수 있습니다. 옛말에 붉은 것 옆에서 붉은 색이 되고, 검은 것 옆에서는 검은 색이 된다며 ‘근주자적근묵자흑(近朱者赤近墨者黑)’이라 가르친 것 역시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요즘 대한민국 정치가 국민에게 보여주는 정치의 색깔이 한심합니다. 정치뿐만이 아닙니다. 경제가, 사회가, 문화예술이 다 우울한 색입니다.

  ‘대통령병’에 걸린 지도자들과 제창과 합창을 두고 대립하는 정치를 만나면 회색이 되고, 이미 불황의 긴 터널에 갇힌 경제를 만나면 까만색이 됩니다. 그러다가 우리 시대 청년을 생각합니다. 청년을 색깔로 보면 쪽빛일 것입니다. 같은 색깔인, 하늘같은 꿈과 바다 같은 열정을 가진 세대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푸른빛의 주인인 이 시대 청년들이 푸른빛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 같습니다.

  청년에게 푸른빛을 돌려주는 대한민국이 됐으면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이 되고, 바다를 바라보면 그냥 그대로 바다가 되는 청년의 푸른색을 찾아주는 사회가 됐으면 합니다. 무기력해진 청년을 위해 용기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열정과 도전과 선물하고 싶습니다. 밝고 희망에 찬 쪽빛을 새파랗게 물들여주고 싶습니다. 청년이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위 글은 경상일보 2016년 5월 20일(금)자 19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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