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일보 칼럼] 정일근 교수
[경상일보 칼럼] 정일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6.04.22 09: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詩)는 공감할 때 빛난다

  논란 일으킨 서울 지하철의 시 소개

  공익성 담보하지 않아 예고된 망신살

  시는 독자와 공감할 때 위로와 선물


  서울 지하철의 시(詩)가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서울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2000편의 시가 소개돼 있다고 한다. 시인 행세하고 살지만 그렇게 많은 시가 소개돼 있는지 몰랐다. 그 편 수에 놀랐다. 시집으로 치면 30권 이상의 분량이다. 공자는 ‘시삼백(詩三百)을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면 왈(曰) 사무사(思無邪)’라고 했는데. 서울 지하철의 무려 2000편 시가 오히려 시인들에게 망신살이 되는 이 불편한 현실은 무엇인가.

  시민들이 민원으로 제기한 불편한 작품은 ‘선정적인 시’ ‘불쾌한 시’ ‘사회주의 선동 시’ 등이 있었다. 찾아 읽어보니 개인 시집 속에 들어있다면 큰 문제가 될까 싶었다. 문제는 선정할 때 지하철이란 장소의 ‘공익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더러는 ‘지옥철’이라 불리는 지하철 시를 무더기로 게재한다는 발상이 틀렸다. 고단한 현실 속에서는 시가 편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시비가 생길 여지가 많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공익성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위로가 되지 못하면 시비나 욕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 아닌가. 학창시절 시인이 되고 싶었다는 동료 교수로부터 지하철 시를 보니 시인이 안 되길 잘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미 예고된 ‘시 망신’이다.

  사실 나에게 서울 지하철 시에 게재할 시를 보내달라는 청탁서가 왔었다. 나는 시를 보내지 않았다. 무더기로 시인이라는 ‘이름’을 대접받지 못하는 자리에 나는 참가를 사양하고 있다. 언제 울산지역 문학단체에서도 그런 전화를 했었다. 서울 지하철과 유사한 형식으로 울산시내 버스에 시를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그 역시 정중히 사양했다.

  시는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 서울 교보문고의 ‘광화문 글판’이 그런 자리다. 불특정 다수인 읽는 사람들과 마음으로 ‘공감’해야 한다. 서울 지하철 시는 그 공감에 실패했다. 대한민국에, 울산광역시에 시인이 너무 많다. 시인이 많지만 좋은 시집은 읽히지 않는다.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릴 때 좋은 시가 된다.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좋은 시의 선별은, 선별과정에 ‘매의 눈’이 필요하다.

  여기에 공무원이 개입돼 엉망이 되는 경우를 더러 경험했다. 공무원은 합목적성을 갖기 위해 위원회를 선정한다. 그 위원회는 작품을 보는 ‘눈’이 아닌, 행정의 지원을 받는 단체의 장인 ‘계급장’이 주로 참여한다. 그리고 이런 저런 외압이 들어온다. 결국 시장이나 자치단체장과 친하다는 시인들의 작품이 끼이게 되더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시가 무슨 대단한 ‘벼슬’이라는 것은 아니다. 시는 사람이 사는데 좋은 친구다. 시를 읽고 쓰는 일은 인생의 좋은 동반자다. 자기 자신에게 위로가 되고 선물이 된다. 앞에서 말한 공자는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고까지 하지 않았는가.

  시의 위의는 시인들이 지켜야 한다. 자기가 설 자리가 아니면 서지 않아야 한다. 시인의 명예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예산 받고 심사하는 자리가 명예가 아니다. 그런 자리는 봉사가 돼야 한다. 이런 저런 일에 나서거나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시인은 스스로 공화국이고 그 공화국의 주인이라고 했다. 독자로부터 존중받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 스스로 작품에 노력해야 한다. 시인들과는 선린이어야 하며, 시를 팔아 생색내거나, 시를 대접하지 않고 장사하려는 기관이나 단체에는 엄해야 한다.

  차제에 서울 지하철 시가 가져온 막대한 예산낭비와 시인과 독자를 공분하는 일이 없도록 행정이 첫 단추부터 엄격하게 채워주길 부탁한다. 시는 소모품이 아니라 생산적인 상품이라는 생각을 가져주길 바란다.

<위 글은 경상일보 2016년 4월 22일 (금)자 19면에 전재한 기사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